1969년 기협 중심 신문회관 신축운동

한국신문회관·해외 프레스센터 운영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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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년 한국신문회관에서 기자협회 주최로 열린 제1회 한국기자상 수상식의 모습.  
 

미·일 프레스센터 “명실상부한 언론의 전당”

프레스센터가 정부의 개입이 아닌 언론계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회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혜택을 줄 수 있을까. 환경은 다소 열악했지만 언론단체들이 운영권을 가졌던 한국신문회관 시절을 보면 어느 정도 밑그림이 잡힐 수 있다. 프레스센터가 명실상부한 ‘언론의 전당’으로 자리잡은 미국과 일본 프레스센터의 경우도 참고가 될 듯하다.


“내 집 가진 뿌듯함”
언론계 원로들은 과거 한국신문회관 시절을 회고하면서 “어렵고 아쉬운 게 많았지만 우리들만의 회관이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1960년대 말 경, 당시 기자들의 월급은 쌀 한 가마 사면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당시 1등신문이었던 한국일보가 월급을 한달에 두 번으로 나눠서 주는 형편이었다. 기자들의 생활이 어땠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기자들만의 회관이 있다는 건 적지않은 위안이 됐다.

특히 2층의 도서관은 항상 기자들로 가득 찼다. 작고한 조선일보 홍종인 전 주필이 상근하다시피 하면서 살림을 맡아봤다고 알려진다. 각 신문·방송사 별로도 자료랄 게 별로 없던 시절이다. 기자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소중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취재에 큰 도움을 얻기도 했다. 당시는 언론사가 몇 되지 않던 때라 도서관에 드나들다 보면 친분도 쉽게 쌓을 수 있었다. 도서관이 사랑방이었던 셈이다. 관훈클럽의 노력도 있어 기자들 사이에 공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3층에는 예식장이 있었는데 일반인에게도 개방돼 한때 신문회관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들의 편익을 도모하기에는 시설과 공간이 부족했다. 운영은 이사장을 도맡았던 발행인 중심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69년에는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신문회관 운영 합리화 및 신축운동’이 벌어졌다. 좀더 확충된 시설과 공간을 가진 프레스센터 재건립은 이때부터 언론계의 숙원이 됐다.

원로들은 무엇보다 “어디에 아쉬운 소리하지 않아도 될 내 집을 가지고 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는 회관의 수입을 입주단체들에게 운영비로 지급했다. 1970년 경 각 단체에 배분되던 수익은 연 2백만원 가량. 당시 시내버스비가 15원 할 때이니 그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다. 넉넉지는 않아도 언론단체끼리 운영하고 모든 것을 결정했으니 자율권 하나만큼은 확실했던 셈이다.

신문회관은 ‘취재의 중심’이기도 했다. 1970년 전후로 기자협회가 신문회관에서 주최했던 토론회는 큰 화제를 일으켰다. 베트남전 당시 남베트남의 대통령이었던 티 우를 비롯, 유진산 신민당 당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40대 기수’로 불리던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씨 등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인물들이 신문회관에서 기자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며 만남을 가졌다.

신문회관의 추억을 가진 언론계 원로들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프레스센터 되찾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기자협회 송효빈 고문(제6대 기자협회 회장)은 “언론단체들은 프레스센터 소유권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다”며 “일선 기자들에게 프레스센터를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취재편의 시설 갖춰”
선진국의 프레스센터는 높은 사회적 평가는 물론 취재와 보도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언론의 전당’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의 내셔널프레스빌딩은 워싱턴 백악관에서 두 블록 떨어진 중심가에 있다. 주위에는 재무성, 노동성 주요 부처와 기관들이 자리잡고 있다. 미국 정치·사회의 한 가운데에 뿌리내리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전국기자클럽(내셔널프레스클럽)은 1908년 결성됐다. 내셔널프레스빌딩은 기자클럽의 경영 성과물과 경제계 인사 등의 출연금 등을 더해 1927년 건립됐다. 1984년 한차례 증축해 현재 17층 건물이다. 기자들의 자율적인 모임인 미국기자클럽은 이 건물 13,14층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 주요부처 장관들은 물론 미국을 찾는 각국 정상이나 외교부 장관 등 주요인사들은 내셔널프레스빌딩에 대부분 국가의 특파원이 입주해 있어 이곳에서 오찬연설, 기자회견 등을 연다. 윈스턴 처칠, 네루, 바웬사, 만델라 등 역사적 인물들도 이곳 기자회견장에 섰던 경험이 있다. 한마디로 세계 뉴스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6자회담 직후 럼스펠드 전 국방부 장관도, 한미FTA 미국 측 협상 수석대표인 웬디 커틀러도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1년에 평균 1백60회 이상의 기자회견이 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돈으로 15억원을 들여 개보수한 클럽하우스에는 미국의 언론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물로 장식돼있다. 최신식 보도장비 등 취재 및 기사송고, 방송 제작에 필요한 각종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언론관계 전문 도서관인 에릭 프리드하임 라이브러리(Eric Friedheim Library) 는 매우 유명하다. 내셔널프레스재단과 내셔널프레스클럽의 공동지원으로 국내외 신문 및 각종 정기간행물, 각종 오디오·비디오 자료, 유명 인사들의 오찬 초청 연설 기록, 사진 관계 자료를 갖추고 있다. 편의시설도 다양하다. 헬스클럽, 휴게실, 카드룸도 마련돼있다. 4백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오찬 연설회장 등으로 애용되는 볼륨이나 다양한 행사·미팅 공간들이 있다.


프레스센터가 정부의 개입이 아닌 언론계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회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혜택을 줄 수 있을까. 환경은 다소 열악했지만 언론단체들이 운영권을 가졌던 한국신문회관 시절을 보면 어느 정도 밑그림이 잡힐 수 있다. 프레스센터가 명실상부한 ‘언론의 전당’으로 자리잡은 미국과 일본 프레스센터의 경우도 참고가 될 듯하다. 언론계 원로들은 과거 한국신문회관 시절을 회고하면서 “어렵고 아쉬운 게 많았지만 우리들만의 회관이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1960년대 말 경, 당시 기자들의 월급은 쌀 한 가마 사면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당시 1등신문이었던 한국일보가 월급을 한달에 두 번으로 나눠서 주는 형편이었다. 기자들의 생활이 어땠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기자들만의 회관이 있다는 건 적지않은 위안이 됐다. 특히 2층의 도서관은 항상 기자들로 가득 찼다. 작고한 조선일보 홍종인 전 주필이 상근하다시피 하면서 살림을 맡아봤다고 알려진다. 각 신문·방송사 별로도 자료랄 게 별로 없던 시절이다. 기자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소중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취재에 큰 도움을 얻기도 했다. 당시는 언론사가 몇 되지 않던 때라 도서관에 드나들다 보면 친분도 쉽게 쌓을 수 있었다. 도서관이 사랑방이었던 셈이다. 관훈클럽의 노력도 있어 기자들 사이에 공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3층에는 예식장이 있었는데 일반인에게도 개방돼 한때 신문회관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들의 편익을 도모하기에는 시설과 공간이 부족했다. 운영은 이사장을 도맡았던 발행인 중심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69년에는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신문회관 운영 합리화 및 신축운동’이 벌어졌다. 좀더 확충된 시설과 공간을 가진 프레스센터 재건립은 이때부터 언론계의 숙원이 됐다. 원로들은 무엇보다 “어디에 아쉬운 소리하지 않아도 될 내 집을 가지고 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는 회관의 수입을 입주단체들에게 운영비로 지급했다. 1970년 경 각 단체에 배분되던 수익은 연 2백만원 가량. 당시 시내버스비가 15원 할 때이니 그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다. 넉넉지는 않아도 언론단체끼리 운영하고 모든 것을 결정했으니 자율권 하나만큼은 확실했던 셈이다. 신문회관은 ‘취재의 중심’이기도 했다. 1970년 전후로 기자협회가 신문회관에서 주최했던 토론회는 큰 화제를 일으켰다. 베트남전 당시 남베트남의 대통령이었던 티 우를 비롯, 유진산 신민당 당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40대 기수’로 불리던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씨 등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인물들이 신문회관에서 기자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며 만남을 가졌다. 신문회관의 추억을 가진 언론계 원로들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프레스센터 되찾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기자협회 송효빈 고문(제6대 기자협회 회장)은 “언론단체들은 프레스센터 소유권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다”며 “일선 기자들에게 프레스센터를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선진국의 프레스센터는 높은 사회적 평가는 물론 취재와 보도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언론의 전당’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의 내셔널프레스빌딩은 워싱턴 백악관에서 두 블록 떨어진 중심가에 있다. 주위에는 재무성, 노동성 주요 부처와 기관들이 자리잡고 있다. 미국 정치·사회의 한 가운데에 뿌리내리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전국기자클럽(내셔널프레스클럽)은 1908년 결성됐다. 내셔널프레스빌딩은 기자클럽의 경영 성과물과 경제계 인사 등의 출연금 등을 더해 1927년 건립됐다. 1984년 한차례 증축해 현재 17층 건물이다. 기자들의 자율적인 모임인 미국기자클럽은 이 건물 13,14층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 주요부처 장관들은 물론 미국을 찾는 각국 정상이나 외교부 장관 등 주요인사들은 내셔널프레스빌딩에 대부분 국가의 특파원이 입주해 있어 이곳에서 오찬연설, 기자회견 등을 연다. 윈스턴 처칠, 네루, 바웬사, 만델라 등 역사적 인물들도 이곳 기자회견장에 섰던 경험이 있다. 한마디로 세계 뉴스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6자회담 직후 럼스펠드 전 국방부 장관도, 한미FTA 미국 측 협상 수석대표인 웬디 커틀러도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1년에 평균 1백60회 이상의 기자회견이 열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돈으로 15억원을 들여 개보수한 클럽하우스에는 미국의 언론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물로 장식돼있다. 최신식 보도장비 등 취재 및 기사송고, 방송 제작에 필요한 각종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언론관계 전문 도서관인 에릭 프리드하임 라이브러리(Eric Friedheim Library) 는 매우 유명하다. 내셔널프레스재단과 내셔널프레스클럽의 공동지원으로 국내외 신문 및 각종 정기간행물, 각종 오디오·비디오 자료, 유명 인사들의 오찬 초청 연설 기록, 사진 관계 자료를 갖추고 있다. 편의시설도 다양하다. 헬스클럽, 휴게실, 카드룸도 마련돼있다. 4백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오찬 연설회장 등으로 애용되는 볼륨이나 다양한 행사·미팅 공간들이 있다.

일본의 프레스센터빌딩은 1976년 8월 동경에 건립됐다. 일본기자클럽은 이 건물 9층과 10층을 쓰고 있다. 기자회견장, 다이닝룸, 도서실, 대회의실 등 각종 취재보도편의시설을 갖춰놓고 있다.

일본기자클럽은 1970년 설립됐으나 거점으로 이용할 장소가 없었다. 프레스센터 건설을 위해 1972년 (주)일본프레스센터를 6억엔의 자본으로 발족해 일본신문협회의 지원 아래 1975년 건설에 들어갔다. 일본프레스센터의 사장은 일본신문협회 회장이 겸임하고 있다. 신문협회의 운영위원들이 임원을 맡고 있다.

1976년 건립된 일본프레스센터는 총 11층 규모로 방송중계 및 동시통역이 가능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언론인들이 약속을 잡는 등 사교생활을 위한 라운지, 식당, 당구나 브리지게임 등을 즐길 수 있는 오락 공간도 확보돼있다.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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