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암흑기 5공 '기자협회보'도 폐간
역대 정권 언론통제 사건③ <끝>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 | 입력
2007.09.12 14:59:15
|
 |
|
|
|
▲ 1986년 9월9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기자회견을 갖고 보도지침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
|
|
5공화국 시절은 언론탄압이 가장 극악했던 시기였다. 이후 노태우, 김영삼 정권 때는 일종의 해빙기였다. 민주화에 따라 통치자의 권력은 약화된 반면, 언론의 힘은 커졌다. 역설적으로 민주화를 이끈 김대중 정권 이후 언론과 권력의 갈등은 다시 시작됐다. 이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언론통제는 5공화국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신군부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1980년 말 언론통폐합을 단행했다. 전국 일간지는 28개에서 17개로 줄었다. 7개였던 통신사는 연합통신 1개로 통폐합됐다. 전국 29개 방송사 가운데 TBC 등 6개가 KBS에 흡수됐다. MBC 지방 제휴사들은 계열사화됐고 5·16장학회(정수장학회) 지분을 제외한 MBC의 민간주식은 모두 정부에 헌납됐다. 기자협회보를 비롯한 정기간행물 1백72종이 폐간됐다. 이 과정에서 약 2천여명의 언론인이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보안사 언론인대책반은 언론인 해직대상자를 선정했는데 그 숫자가 9백33명에 이르렀다. 전두환 정권은 전국 1천9백명의 언론인을 새마을연수원에 입소시켜 2박3일 동안 군사적 집단교육을 시켰다.
1980년 12월26일에는 3개 언론관계법을 통합해 언론기본법을 제정했다. 이 법으로 문공부 장관은 언론사의 정·폐간을 결정할 수 있는 절대 권한을 가졌다.
5공 정권은 문공부 아래 홍보조정실을 두고 ‘보도지침’으로 언론을 통제했다. 청와대의 지휘 아래 홍보조정실은 매일 언론사에 그날 지면에 대한 지침을 전달했다. 이는 1986년 9월 ‘말’지가 폭로했다. 언론기본법과 문공부 홍보조정실, 프레스카드제는 1987년 6·29선언 이후에 폐지됐다.
‘언론인개별접촉보고서’와 언론사 세무조사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88년 한겨레신문, 국민일보가 창간되고 신문의 수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론 통제 시도는 계속됐다. 노태우 정권은 사이비 기자 단속을 이유로 프레스카드제 부활을 검토했다. 1988년 국정감사기간 중 국회 문공위 소속 의원들은 ‘언론인 개별 접촉 보고서’를 발견했다. 한겨레신문은 12월13일자에 이를 보도했다. 문공부 홍보조정실이 폐지되고 신설된 홍보정책실은 언론사별로 접촉대상자를 선정해 보도협조 요청 사항을 알려주고 사내 동정을 입수해 보고서로 작성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헌정 사상 최초의 민주화세력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권 아래서 언론과 정부의 갈등은 다시 표면화됐다. 가장 큰 논란은 언론사 세무조사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연두기자회견에서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곧이어 2월 24개 언론사를 상대로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이 결과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동아일보 김병관 명예회장, 국민일보 조희준 회장이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됐다.
세무조사를 두고 한나라당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은 “정당성 없는 언론탄압”이라고 맞섰다. 그러나 당시 전국언론노동조합의 여론조사 결과 언론사 일선기자 75.4%와 국민 64.1%가 세무조사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월에는 국세청이 일선 신문사 차장대우 이상 기자들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조사해갔다는 주장이 나와 조선일보, 중앙일보 노동조합이 이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대중 정권에 앞서 김영삼 정권도 1994년 2월 10개 언론사를 대상으로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조사결과는 공개되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정권이 세무조사를 실시할 무렵인 2001년 2월 도쿄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94년 세무조사 당시 사주들의 비리를 대거 포착했으나 큰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세무조사에 이어 ‘신문고시’가 부활되자 조선·중앙·동아 등 보수 신문은 “계획된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했다.
정권 초기인 1998년 청와대 비서실 출입봉쇄가 논란이 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과 함께 ‘백악관식 브리핑제’ 도입을 추진하면서 기자들의 비서실 출입을 금지했다. 청와대 기자단은 성명을 내고 “이같은 봉쇄 조치는 과거 군사정권에서도 없었던 일로 ‘국민의 정부’를 자임하는 현 정권에서 발생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고 맞섰다. 결국 이 갈등은 하루 2차례 비서실을 개방하기로 절충하면서 풀어졌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언론대책문건’ 시비가 많았다. 1998년 1월 정권인수위 때 작성된 ‘새 정부 언론정책 추진계획’은 방송을 정권 협조적으로 만들어 비판적인 신문에 대응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999년 10월에는 한나라당이 ‘성공적 개혁을 위한 외부환경 정비방안’이란 문건을 폭로했는데 여기에는 조중동 등 주요 신문에 대한 세무 조사 및 사주의 사법처리’가 언급됐다. 시사저널도 2001년 10개 일간지를 반여지·중립지·친여지로 나눠 ‘반여지’ 관리대책을 다룬 3종류의 정부 언론보고서를 보도했다. 2002년에는 이수동 아태평화재단 전 상임이사 집에서 발견된 ‘이수동 문건’이 논란을 불렀다.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 언론개혁이 시급하며 시민단체를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 뼈대였다.
김대중 정권 때 없어진 공보처와 비교되는 국정홍보처는 1999년 5월 신설됐다.
과거와 비교는 무리…현 정권 언론관도 퇴행적 일부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프레스카드제도 실시와 기자실 축소 등 역대정권의 언론통제정책을 노무현 정권의 ‘취재선진화방안’과 비교하며 ‘언론탄압’이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언론을 통제하려는 정책이라고 해서 역사적 배경의 차이를 무시하고 비교하려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다.
한국외국어대 정진석 명예교수(언론정보학부)는 “노무현 정권의 조치를 언론통제라고 규정할 수는 있으나 정치·경제·언론 환경이 급변한 지금 과거 정권의 정책과 비교하는 것은 넌센스”라며 “독재정권의 탄압과 견주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현 정부의 언론관과 정책이 시대 역행·퇴행적인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권력이 축소되는 대통령 등 통치자들과 이를 견제하려는 언론 등 대의기관과의 마찰은 불가피하다는 분석도 있다.
역대 미국 백악관의 언론관계를 다룬 책 ‘대통령과 언론, 친구인가 적인가’를 편역했던 경향신문 설원태 선임기자는 “한국 뿐 아니라 미국, 일본 등 민주화된 선진국의 권력자도 언론이 자기를 우호적으로 보도해주기를 당연히 원하며 이를 위해 갖가지 언론정책을 내놓는다”면서 “노무현 정권은 그것을 적대적이고 저열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