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적 시각서 '태안 유출사고' 다뤄야
편집위원회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08.01.23 12:56:26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기와 절망감에 태안반도 주민 3명이 목숨을 끊었다. 그 죽음의 불꽃이 사회적 공기라는 언론과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태안 기름 유출사고의 장본인 삼성중공업은 22일에야 일간신문에 일제히 공식 사과문을 게재 했다. 하지만 삼성은 유독 한겨레에는 사과광고를 하지 않았다. 과연 삼성의 진심이 엿보이는가.
취재진에 따르면 삼성측은 “1차 배상책임이 선주사에 있는 만큼 삼성보다 어민 피해 보상을 위한 입증 증거 확보가 중요하다” “국내 자금보다 외국 돈을 먼저 확보하는 게 우리 나라에 도움”이라는 식의 언사를 보인다는 것이 취재 기자들의 전언이다. 그러면서 광고를 이용한 언론사 목줄죄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미 삼성중공업의 책임을 질책하는 기사를 게재한 경향과 한겨레에 대해 2개월 넘게 광고를 중단한데 이어, 기자협회보에 대한 광고도 뚝 끊어버렸다. (광고 중단의 배경에는 김용철 변호사 기사에 대한 대응 차원도 있음.) 물론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 자본의 힘을 스스로 포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삼성을 탓하는 것은 입만 아프다. 다만 알래스카 기름 유출 사고 이후 사과 한마디 않다가 여론의 질타로 뒤늦게 사과와 함께 수습책에 나섰던 엑슨 발데스호 사건이 실패한 PR 사례로 교과서처럼 인용된다는 점, 그리고 엑슨 모빌사가 일반 손해배상을 넘어서는 수 조원대의 징벌적 손해배상으로 이미지는 물론 금전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릴뿐이다.
언론은 어떠한가. 사고 직후 삼성이라는 이름을 명기 하지 않은데서 출발하여, 숨진 어민의 영결식 기사는 일부 방송과 극소수 신문, 그리고 통신 기사에서나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급기야 삼성에 침묵하는 언론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현지 주민의 글을 활자가 아닌 인터넷을 통해서야 접하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현대의 언론사에서 과거 ‘시일야방성대곡’을 외쳤던 지사형 기자는 멸종됐다고들 하지만 자본과 권력에 대한 감시자 역할을 포기했다고 여기는 언론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해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세세한 팩트는 검은 기름처럼 매일 매일 쏟아내면서 기름 문제는 다른 기자들이 알아서 취재할 일이라는 ‘나와바리(구역)’ 셈법을 하고 있지 않은가. 광고국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스스로를 움츠러뜨리는 소심함을 담배 연기로 날려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나마 보상 문제를 다루는 소수 언론도 전혀 문제가 없지는 않다. 사고 보상의 범위를 법적 책임에 따른 보상 액수의 상한을 두고 따지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규정이 이리 저리 됐으니 얼마큼의 보상이 될 것이고 그나마 방제 작업에 들어간 비용을 제하고 나면 이것 밖에 안된다 식으로 어민들의 초조함만 가중 시키고 있다.
중요한 것은 피해 규모이다. 그에 따른 보상이라는 시각보다 법적으로 따졌을 때 3천억원이 한도라는 틀에 묶여 있는 듯 하다. 최근 들어서야 중과실 여부를 따지거나 징벌적 손해배상 개념으로 보상액 상한을 없애려 하는 일부 언론의 기사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반가운 일이다.
알래스카 기름 유출사고의 엑슨 발데스사 경우 미국의 주정부가 나서 엑슨사와 협상을 벌여 끝까지 법적 책임을 넘어서는 조 단위의 배상금을 받아냈다. 인터넷 몇 번 클릭해보면 나오는 이 같은 사실을 언론은 제대로 지적하고 있는가.
국민이 모아준 성금도 제대로 분배하지 못하는 정부를 뒤늦게서야 ‘준엄하게’ 꼬집는 언론. 정부가 소송지원 차원이 아니라 소송의 당사자로서 가해자측과 적극 협상을 벌이게 하는 다그침을 언론은 제대로 하고 있는가. 언론이 판사가 아닌 것이 분명하기에 논의의 틀을 법적 틀이 아닌 국민의 시각에서 보도록 해야한다. 그래서 정부가 방관자가 아닌 당사자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잠시의 방심으로 천혜의 터전이 검은 기름으로 뒤덮이듯 기업 윤리와 언론의 사명에 대한 잠깐의 눈 감음이 언론의 든든한 뒷배인 여론, 민심의 이반 이라는 더욱 큰 해악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