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모순, 저널리즘과 함께 詩로 표현"

기형도 시인 타계 20주기…문단의 기자들

기형도(1960~1989년) 시인이 타계한 지 올해로 스무 해가 지났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 뿐이었구나’,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같은 암울하고 어두운 이미지로 각인된 촉망받던 젊은 시인.

그는 중앙일보 기자였다. 1984년 10월 중앙일보 21기로 입사해 수습 후 정치부로 첫 발령을 받았다. 그후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돼 문단에 나왔고 문화부·편집부 기자로 일하며 시를 썼다. 그에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기형도 시인의 존재는 언론계에 건조한 스트레이트와 강도 높은 업무만이 아니라 문학이 살아 숨 쉴 수 있음을 방증해준다.

실제 현직 기자로 일하며 자신의 문학세계를 펼치는 시인들이 의외로 많다. 특히 국민일보 정철훈 기자, 한국경제 고두현 기자, 매일경제 허연 기자 등은 시단에서도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는 중견시인들이다. 그들은 왜 시를 쓰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詩를 쓴다는 것은 생존의 한 방식”


   
 
  ▲ 국민일보 정철훈 기자  
 
정철훈 국민일보 문학담당 기자는 1997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백야 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는 “시를 쓴다는 것은 생존의 한 방식”이라며 “시대의 모순을 저널리즘과 함께 다른 표현방식인 시라는 장르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기자생활을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문학의 미완성’일 수 있지만 젊은 시절엔 저널리즘과 문학 모두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고도 술회했다.

1995년 국민일보 기자 시절 모스크바 주재기자로 파견됐을 당시 대학시절 품고 있던 시가 그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시 ‘백야’에서 이렇게 썼다. “모스끄바에 와서야 어둠은 비로소 밝혀지고 있었다/ 기억 속에 가라앉았던 어둑한 밤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스스로 발광(發光)하며 젖은/ 자작나무숲의 비린내를 풍겨오는 하얀 밤/ 다시 혁명을 위하여 밤은 깊을수록 좋았다”

그후로 그는 시간을 쪼개 글을 쓴다. 점심시간이면 마포도서관에서 2시간가량 글을 쓰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에게 시는 저널리즘과 함께 평생을 두고 추구해야 할 가치로 각인돼 있다.

“기자라는 직업, 문학에 도움”


   
 
  ▲ 한국경제 고두현 기자  
 
고두현 한국경제 문학담당 기자는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유배시첩’이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2000년 첫 시집부터 시단의 주목을 받았던 잘 알려진 시인이다.

그는 “신경림 시인이 현실과 일상에 발을 딛지 않은 문학은 죽은 것이라고 말했듯 현장이 아닌 골방에서 글을 쓴다고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며 “기자일은 현실의 폭과 깊이를 가장 여실하게 접할 수 있는 직업이라 문학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경남 남해가 고향인 그의 시에는 행간마다 포구의 해풍처럼 곰삭은 세월이 깊고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생활에서 건져 올린 느린 시는 커다란 울림이 되어 퍼진다.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고 기자는 그만의 서정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는 출세작인 ‘늦게 온 소포’에서 이렇게 썼다.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고 기자는 ‘문인 기자’가 많이 나와 주길 바랐다. 그만큼 현실을 항상 주시하고 있는 기자의 눈이 문학에도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세상과 싸우며 詩 쓰겠다”


   
 
  ▲ 매일경제 허연 기자  
 
허연 매일경제 문학담당 기자는 1995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로 “무의미의 의미’라는 두려우리만치 아름다운 미학”(문학평론가 故 황병하)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후로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했고 13년간 침묵했다.

지난해 그 침묵을 깨고 시집 ‘나쁜 소년이 서있다’를 펴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5년 전 문득 시가 기자인 나를 구성하는 너무나 중요한 요소라는 걸 알았다”고. “내가 복무했던 것,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 그게 바로 시였고 이제 행복하다”고.

허 기자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현실과 비현실, 자본과 비자본적인 것에 대한 괴리로 혼란스러웠던 적도 있었다”며 “세상을 버리고 시를 쓸 것인가 세상과 싸우며 시를 쓸 것인가 많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또 기자생활을 하면서 삶과 부딪치고 시를 길어올리고 있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에 ‘권진규의 장례식’ 외 7편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 밖에 소설가로는 세계일보 조용호 기자, 헤럴드경제 이문환 기자가 활약 중이다. 조 기자는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왈릴리 고양이 나무’ 등의 소설집을 펴냈고 단편소설 ‘신천옹’으로 2009년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에 뽑히기도 했다. 이문환 기자 역시 최근 펴낸 ‘플라스틱 아일랜드’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들은 모두 시인 기형도처럼 저널리즘과 문학의 경계에서, 혹은 경계를 허물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 외에 문인기자로는 김훈 전 한국일보 기자, 고 김소진 한겨레 기자, 고종석 전 한국일보 기자, 김중식 전 경향신문 기자 등이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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