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생활 20년,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정년퇴임 앞둔 KBS 김준석 앵커


   
   
“KAL기 폭파,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내한,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참사, 남북정상회담…. 글쎄요, 뭘 꼽아야 될지 모르겠네요.”

앵커로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을 묻자 김준석 앵커는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되뇌는 대형 사건·사고들을 듣고 있으니 마치 우리 현대사의 역정을 ‘빨리 되감기’하는 듯했다. KBS가 보도했던 역사의 현장에는 그가 있었다.

20년 넘게 KBS의 간판 앵커로 활약해온 김준석 앵커는 이제 시청자들과 이별을 연습하고 있다. 정년퇴임을 앞둔 김 앵커는 이번 봄철 프로그램 개편에 따라 그동안 진행해오던 일요뉴스타임과 정오뉴스를 모두 떠났다. 이제 앵커로서 그의 모습을 보기는 어렵게 됐다.

그는 일찍부터 앵커 석에 앉았다. 초년병 기자로서 외신부에서 일하던 1984년 봄, 아침 뉴스인 ‘KBS 645’에 출연했던 게 인연이었다. 휴일 당직 중 갑작스러운 요청으로 원고도 없이 3~4분 동안 외신뉴스를 브리핑하고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한 간부에게서 급히 전화가 걸려왔다. 서슬 퍼렇던 5공화국 시절이라 “내가 무슨 밉보일 말을 했나” 싶었는데 다음날부터 외신담당 보조앵커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가을에는 KBS 645의 메인 앵커로 발탁됐다. 앵커로서 삶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KBS에서 29년의 기자생활 중 20년 이상을 앵커로 일했다. 후배들은 그가 앵커로서 장수할 수 있었던 이유를 “마이크 체질” “특보 생방송의 귀재”라는 표현으로 갈음했다. 그는 “과찬입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의 발자취가 앵커로서만 남은 것은 아니다. 김준석 기자는 1994년 7월, 김일성 북한 주석의 사망을 첫 보도했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 주석의 사망설이 돌았다. 대북 정보가 철저히 차단되던 시절이라 ‘팩트’ 확인은 언감생심이었다. 불현듯 사회부 시절 취재했던 아마추어 무선(햄)이 떠올랐다. 급히 협조를 얻어 북한 평양방송을 직접 청취했다. 정오 방송에서 “김일성 동지가 7월8일 2시 급환으로 서거하셨다”라는 코멘트가 나온 10초 뒤, 그는 뉴스센터를 연결해 1보를 터뜨렸다. 이듬해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한국기자상을 받은 이 보도는 내외통신의 북한방송 독점 관행을 깨뜨린 사건으로도 기록된다.

그러나 그에게도 힘든 기억은 남아 있다. 1980년대 군사정권 치하, 목젖까지 차오르는 이야기를 억눌러야 했던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앵커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 역시 역사의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9시 뉴스 앵커를 맡지 못했던 것도 아이러니다. 주말 앵커를 잠시 했을 뿐 9시와의 인연은 멀었다. 아쉬움이 남을 법도 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선후배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며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김준석 앵커는 “앵커는 몹시 외로운 일”이라고 고백했다.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무정한 카메라만이 자신을 응시하고, A4용지 몇 장과 볼펜 한 자루만이 주어질 뿐. 앵커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무인도가 된다. 급박한 현장의 호흡을 놓칠세라 두 눈을 부릅떠야 했던 20여 년은 자기와의 끊이지 않는 싸움이었다.

휴가조차 가기 힘든 긴장의 연속이었던 생활 탓에 후배들과 미처 못다 했던 이야기를 퇴임 전까지 나누고 싶다는 게 노 앵커의 마지막 바람이다. “동료들이 있어 제가 존재했습니다”라는 그의 말은 구두선(口頭禪)이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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