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언론, 칼보다 강한가?


   
 
  ▲ 박경철 안동 신세계병원장  
 
사자성어 중에 의미가 중의적으로 사용되는 대표선수로 ‘설망어검(舌芒於劍)’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혀가 칼보다 날카롭다’는 뜻이니, ‘문사(文士)의 논변(論辯)이 날카로움’을 뜻하는 말로 자주 쓰이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총칼보다 글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정반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용례에 극단적 ‘양면성’이 있는 셈이다.

대저 말이란 현상을 설명하는 도구지만, 언어 자체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특정 현상을 제3자에게 온전하게 전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바벨탑 붕괴 이후 사람들이 누구는 ‘사과’, 태평양 너머 또 누구는 ‘apple’, 대서양 너머 어떤 이는 ‘pomme’라 부르는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상황을 적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언어적 용법의 차이, 즉 적어(適語)를 선택하는 능력의 차이가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기자가 ‘아프리카 수단에서 기아로 죽어간 아이가 손에 쥐고 있던 말라 비틀어진 사과 한 조각’을 한 줄의 문장과 그 배경을 통찰할 수 있는 하나의 ‘적어’로 기사를 쓰고, 그것이 독자들의 가슴을 관통하고 심금을 울렸다면 그 기사는 ‘설망어검’의 첫번째 ‘용례(用例)’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용례는 문제가 자못 심각하다. 이 말이 길상사 회주 ‘법정스님’의 말처럼 ‘입안의 도끼’를 지칭하게 되는 경우다. 언어가 누군가를 지칭하고 행위를 설명할 때 그 용례가 적절치 못하면 그것은 ‘살인의 도끼’가 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차도살인(借刀殺人)’, 즉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사례가 ‘신정아씨 사건’이다.

먼저 이 사건에서 신정아씨의 잘못은 명백하다. 법원의 판단에 의해 유죄가 인정되었고, 기소 전 단계에서도 유죄의 방증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첨예한 관심거리가 될 소지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신정아씨 개인의 범죄적 구성으로 볼 때 그의 미래적 삶에 대한 완전한 파멸과, 그 가족단위의 해체까지 초래하며 단죄되어야 할 사안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데 세간의 관심은 그렇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역시 ‘개가 사람을 문 경우’ 만큼 극적인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신정아씨는 자신의 잘못에 비해 과도한 인격살인을 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언론사의 입장에서 지금의 그를 보면 과연 어떤 마음일까? ‘아마 일말의 연민이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단죄되어야 할 주홍글씨가 새겨진 여인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마 모르긴 해도 ‘가치가 현저히 떨어진 취재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전투기 조종사가 민간인 마을에 미사일을 쏠 때 조종사는 단지 버튼을 누르고 적중했음을 알리는 신호를 확인한 다음 ‘브라보’를 외칠 뿐이지만, 결과는 차라리 그가 람보 칼을 들고 어린아이 수십 명의 목을 벤 것보다 더 참혹한 것이듯 언론의 역할도 그렇다.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나 많은 제2, 제3의 신정아씨를 발견한다.

이를테면 얼마전에 있었던 연예인 스캔들도 마찬가지다. 그 스캔들의 진위와 관계없이 이미 많은 사람들의 명예가 극적으로 훼손되어 버렸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명예는 복구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점들이 언론에 드리워진 숙명적 요소인지도 모른다. 말과 글로서 현상을 설명하고 압축적 언어로 현상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입안의 도끼’가 던져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하더라도 최소한 그 동기와 과정은 ‘날카로운 논변’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언론’이 사회로부터 특별한 위상을 부여 받는 것이다. 하지만 논변이 날카로움을 ‘지향’하지 못하고 날카로움을 ‘지양’하려고 할 때, ‘칼보다 펜이 강하다’는 만고의 진리가, ‘칼보다 펜이 악하다’는 치명적 역설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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