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감시자 역할 제대로 못하면 역사후퇴


   
 
  ▲ 박경철 안동 신세계병원장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자신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 말이다.

그녀는 미국의 교양잡지 ‘뉴요커’의 위탁을 받아 나치 학살의 주역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참관한 뒤 ‘아이히만’의 죄는 바로 ‘악’에 대한 ‘banality(평범성, 진부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자신의 범죄에 대해 후회하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수백만의 아이와 남녀를 상당한 열정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답하는 전범의 가증스러운 답변을 두고 그것은 단지 ‘무지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고 차분하게 결론을 내린 것이다.

덕분에 그녀는 들끓는 여론으로부터 스스로 유태인이면서 유태인의 아픔을 외면한 배신자로 낙인 찍혀 유태계 사회에서 매장되는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 보고서는 ‘악마적 행위를 한 행위자는 의외로 평범할 수 있다’는 그야말로 평범한 진리를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녀는 보고서를 통해 ‘아이히만’은 이성보다 ‘관용적인 언어’, 이를테면 ‘조국’, ‘숭고’, ‘충성’과 같은 용어에 지배받고 있었다고 지적하며, 그 이유를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판단의 무능성’이라는 3가지 무능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즉 아이히만은 스스로의 특별한 의식없이 단지 ‘조국의 명령’이라든지, 혹은 ‘게르만의 영광’과 같은 지극히 단조롭고 관용적인 용어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이런 용어와 개념에 대한 몰이해와 무능함이 결과적으로 생각하기의 무능과 판단의 어리석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2009년 현재의 대한민국은 어떤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친미와 반미, 자주와 외세, 냉전과 평화 등 수도 없는 관용구에 둘러싸여 있다. 때문에 ‘말하기의 무능성’을 가진 우리 중에 누군가는 스스로 내뱉은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좌파와 우파’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또 ‘판단의 무능성’에 빠진 누군가는 자신의 행위가 조국에 충성하거나, 짐짓 옳은 일이라는 자의적 판단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다른 누군가를 모욕하고 저주하며 때로는 공격하고, 때로는 혐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대중의 ‘평범성’ 혹은 ‘진부함’은 누가 일깨워야 할까? 그것은 바로 언론이다. 건강한 사회는 ‘진부함’을 깨뜨려주는 ‘지적 긴장’이 존재한다. 끊임없이 논의되는 담론을 공급하고, ‘진실과 거짓’ 혹은 ‘악과 선’에 대해 진부하지 않은 지적 질문을 던지며, 대중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이 바로 언론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언론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언론 스스로가 ‘평범성의 굴레’에 덧씌워져 있다고 여긴다. 우리나라 언론은 스스로가 내건 ‘기치’에 매몰되어 참된 ‘가치’를 판단하지 못한 채 지면을 통해 기사를 쏟아낸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 독자들은 ‘언론의 진부한 속성’을 자발적으로 이해하고, 언론사의 기사를 접할 때마다 ‘진부하지 않고, 평범하지 않는’ 독해력과 판단으로 읽고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비판적 분석능력’을 잃어버린 자는 누구나 거대한 ‘악의 전령’이 될 수 있다. 언론이 ‘진보와 보수’, ‘좌와 우’ 따위의 관용적 사고에 빠져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해에 따른 주장과 아젠다를 생산하면서, 그것을 대중에게 세뇌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또 언론사의 입장에 따라 혹은 조직의 논리에 따라 기자들이 붓을 굽히거나 꺾는다면, 또 그렇게 언론이 감시자의 역할을 포기하고 이해관계에 무릎을 꿇는다면 이제 남은 일은 이나라 대한민국이 제2, 제3의 ‘아이히만’들에게 포로가 되어 역사의 후퇴를 기다리는 것, 단지 그뿐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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