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비정규직 해석


   
 
  ▲ 최진기 경제연구소 대표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법에는 “쓰레기나 먼지를 양탄자 밑으로 쓸어 넣는 것은 특별청결법으로 금지한다”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도대체 왜 만들었는지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를 이런 법률들은 물론 펜실베이니아 사람들도 그 존재를 거의 알지 못하는 ‘황당한 법률’이다. 그 외에도 네바다주에는 “낙타를 타고 고속도로에 나와서는 안된다”는 법률이 있는가 하면, 미시간주에는 “아내의 머리카락은 법적으로 남편의 소유물”이라는 법률도 있다고 한다.

미국의 황당한 법률 사례에 나오는 이런 법률들은 그저 법조문의 한 자락에 걸쳐져 있기만 하다가 눈밝은 호사가들이 발견하여 농담 소재로나 쓰인다. 이런 법률도 법이니 지켜야만 한다고 눈을 부라리면 당연히 ‘웃기는 녀석’으로 취급받을 뿐이다. 법률이란 실상 ‘사회적 합의’의 다른 이름이며, 합의가 없는 법률이란 무용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물 건너 미국의 사례들을 보고 잠시 웃다가 다시 이 땅으로 눈을 돌려보면 그 어처구니없음에 기가 막혀할 상황이 여전히 현실로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바로 비정규직 법안이다.

우리나라의 노동관련법률은 기업들의 무분별한 비정규직 채용을 제한하고자 2년 이상 쓸 근로자는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비정규직이라도 2년 이상 쓰면 최소한 고용의 안정성만은 보장해 주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법률을 두고, 비정규직은 2년마다 해고해야 한다고 해석한다면 차라리 양탄자 밑에 먼지를 쓸어담는 게으른 주부를 처벌해야 한다고 나대는 사람보다 더욱 황당한 사례가 될 것이다.

미국의 희극이 한국의 비극이라도 되듯, 이 땅에서는 이 기막힌 해석이 정부당국에 의해 매우 진지하게 거론되고 있다. 고용이 너무나 유연해서 탈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국정 최고책임자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고용의 유연성이 근본대책이다”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선문답을 내놓는다. 여기에 공공기관들은 직접 행동에 나서 2년 미만의 비정규직 해고에 민간기업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2년을 채운 근로자가 무기계약직으로 바뀌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단호함이다.

이렇게 법률의 정한 취지와 전혀 다르게 악용하는 사례를 일컬어 ‘탈법행위’라고 부른다. 법질서는 당연히 이러한 탈법행위를 위법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한국의 정부와 공공기관들은 탈법행위는 법률에 위반된 것이 아니니 적법하다고 강변한다. 이것은 단언컨대 법치주의가 아니다.

여기에 ‘비정규직의 대량해고 사태가 너무나 안타깝다’고 슬퍼하는 한국의 언론이 더해진다. 이 부조리함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만 하나? 법은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바꾸어 계속 채용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언론은 ‘당연히 해고될 것이며, 해고를 피하고자 한다면 계속 비정규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전제를 바꾸어 버린다.

이쯤 되면 법해석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찾기보다는 먼저 슬픔이 생각나게 된다. 지난 2년간 최악의 불안 속에서 저임금과 차별을 견뎌낸 근로자들에게 “앞으로도 계속 비정규직으로 남으라는 법률이 통과되지 못하면 당신들은 해고되고 말 것”이라고 잔인한 언어를 내지르는 이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무엇보다 슬픔이다.

한때 우리나라의 장관은 “부자들에게 대못을 박아도 괜찮단 말이냐”고 강변한 바 있다. 청와대의 핵심 관계자는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세금을 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힘주어 말한 바 있다.

그런데 1천만명의 비정규직들 앞에서는 “계속 차별과 불안을 감수하든가, 지금 당장 해고당하든가”의 선택지만을 내미는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성이 없다. 그들의 가슴에 박힐 대못과 그들의 억울함에 대해서 우리는 무슨 위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법치를 말하기 이전에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슬픔에 대해서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2009년 한여름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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