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 무용론을 아는가
편집위원회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09.11.04 14:17:21
“커닝은 했지만 점수는 인정한다.”, “회삿돈은 훔쳤지만 돈의 소유권은 인정한다.”, “위조지폐는 분명하지만 화폐로서의 효력은 인정한다.”
“대리투표와 일사부재의 원칙 등을 위배한 것은 인정하지만 방송법과 신문법은 유효하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마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헌재의 해괴한 논리를 풍자하는 말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과정은 잘못됐어도 결과는 인정한다’는 법 상식에 반하는 헌재의 결정에 대해 법과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냉소가 잘 나타나 있다.
한마디로 헌재 결정은 어처구니가 없다. 헌재는 지난 7월 한나라당이 발의한 방송법과 신문법 등 개정안의 국회 처리 과정에서 명백한 위법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했다. 민주당 등 야 4당이 김형오 국회의장을 상대로 낸 권한쟁의심판 사건에서 △국회의원의 심의·표결권 침해 △제안설명과 심의절차, 질의토론 생략 △대리투표 △재적 과반 미달(방송법) 등 다수의 위법행위가 있었음을 신문법은 7대 2, 방송법은 6대 3 의견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헌재 다수의 재판관들은 무효확인청구의 경우 신문법은 6대 3, 방송법은 7대 2 의견으로 기각했다.
법치국가라면 법적 판결에서 원인과 결과 사이의 법리적 일관성과 일치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민주사회의 기본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헌재는 원인과 결과를 분리해 판단하는 초법적 논리를 찾아내 법을 유린했다. 이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나 횡행하던 수법이다.
여기서 우리는 헌재 재판관 9명의 결정을 꼼꼼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신문법과 방송법 모두 입법권 침해는 인정하면서도 법안 무효청구를 기각한 이는 김종대·이동흡 두 재판관이다. 이강국·이공현 재판관은 신문법 처리과정이 잘못됐다면서도 무효청구를 기각했고, 목영준·민형기 재판관은 방송법에 대해 그런 판단을 내렸다. 김희옥 재판관은 신문법은 무효라고 판단했지만 방송법은 입법권 침해 자체를 기각했다. 조대현·송두환 두 재판관 만이 두 법안의 입법권 침해를 인정하면서 법안 무효청구도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들 중 누가 옳고, 누가 해괴한 결정을 내렸는지 분리해서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헌법재판소는 1960년 막 태동할 무렵 박정희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세상의 빛을 못 본 채 유산됐다가 1987년 민주화의 열기와 염원으로 국민들의 손에 의해 비로소 탄생했다. 하지만 지금의 헌재는 없느니만 못한 조직이 됐다. 이번 헌재 결정에 대해 대다수 국민들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치권의 눈치나 보고 해괴한 논리로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헌재. 국민들은 벌써부터 무용론을 외치고 있다.
헌재 결정에 박수 치고 있는 한나라당도 면죄부를 받았다고 착각에 빠져선 곤란하다. 헌재의 해괴망측한 논리 속에 분명히 “국회에서 재논의하라”는 주문이 명백히 담겨 있다. 이를 대충 얼버무린 채 법 재개정에 나서지 않는다면 이명박 정부는 다시 한번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미디어법의 재개정만이 불신과 냉소에 젖은 우리 국민들에게 우리 사회가 법치국가이고, 법과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