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 '우리' 그리고 조선일보 기사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한 선생님으로부터 ‘동무’라는 말이 참 좋은 말인데 사용을 꺼리게 되어 안타깝다는 말씀을 들은 일이 있다. ‘친구’라는 단어에 비하면 순우리말인 데다 어감도 더 부드러운데 북한에서 자주 쓰기 때문에 안 쓰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이해가 안 갔다. 아무리 반공을 국시로 여기던 시대지만 북한 정권의 정치적 입장에 동조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쪽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불이익을 줄 리가 없지 않은가. 동무라는 좋은 말의 사용을 왜 꺼린단 말인가. 그러나 최근 한 신문을 읽으면서 그 당시 내가 느꼈던 의아함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헌법학계의 원로라는 허영 헌법재판연구소 이사장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우리법연구회가 학술단체라고 강변하는 건 설득력이 없다. 이름 자체가 이념적 색채를 띠고 있다. ‘우리’는 북한에서 자주 쓰는 용어다. ‘우리식 민주주의’, ‘우리식 통일’ 이런 말을 연상케 한다. 도대체 무슨 법을 연구하는지 알 수가 없다. 사법의 이념화를 뜯어고치려면 우리법연구회부터 해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교수님에 대한 실례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한 말씀 드린다면 정말 제정신이시냐고 묻고 싶다.

북한에서 자주 쓰는 ‘우리’라는 말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우리법연구회가 이념적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단정 지은 이 인터뷰는 당장 몇몇 누리꾼들의 조롱 섞인 댓글을 불러들였다.

“우리은행에 계좌가 있는데 이념적인 은행이겠구나”, “그럼 조선일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대변하는 이념지인가” 등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논평이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발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대선 과정에서 “우리가 남이가”라고 일갈한 정치인의 발언은 친북 메시지가 숨어 있는 암호문이란 말인가.

최근 논란이 되는 사건에 대한 판결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법원의 판단에 찬성하는 견해도 있고, 당연한 일이지만 반대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문제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논리가 버젓이 언론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합리적인 토론이 이루어지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는 상대방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발심만 일으킬 뿐 수용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방적인 주장은 자제해야 한다. 우리법연구회에 회원으로 가입한 판사들의 입장에서 볼 때 북한에서 잘 쓰는 ‘우리’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만 보더라도 이념적 단체가 확실하다는 말을 듣고 수긍할 수 있겠는가. 이 정도 수준의 공격은 이미 토론과 비판의 범위를 벗어난 인신공격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방과 논의를 통해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볼 의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특정한 판결에 대해서 동의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다. 수십 년간 굳건히 유지되어 오던 판례도 현실의 변화에 따라 하루아침에 변경되는 마당에 법원의 판결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이라고 해서 논리에 근거하지 않은 비난을 퍼붓다보면 자칫 건강한 토론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 언론기관에서 스스로의 논조와 같은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비합리적인 비난을 보도하는 것을 자제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번 냉정히 생각해보자. 판사들이 만든 학술단체를 대법원장이 마음대로 해체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독립적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더욱이 그 해체 지시의 이유 중에 북한에서 많이 쓰는 ‘우리’라는 단어가 단체 이름에 들어가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념적인 단체라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 이유를 다른 나라 판사들에게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까. 이런 인터뷰를 한 허영 이사장이나 그 기사를 실은 조선일보는 정말 그런 상황이 오면 우리가 훌륭한 사법부와 대법원장을 갖게 되었다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을까. 정말 이런 기사가 법원의 판결에 대한 논평으로서 언론에 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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