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시절, 5·18 이산가족 상봉시킨 일 큰 보람"
김재호 한국신문협회장 인터뷰 후기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 | 입력
2010.05.12 14:44:08
김재호 회장은 주요 신문사 발행인 중에서 가장 젊다. 실물은 탄탄한 체격에 나이보다 더 젊어보였다. 깔끔한 정장이 맵시가 났다.
그는 회장 취임 이전까지 대외적으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매체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자협회보와 인터뷰는 잘하면 본전 아닐까요”라며 ‘뼈있는 조크’도 했다.
그러나 인터뷰가 시작되자 매끄럽고 솔직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모바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직접 조작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뉴미디어와 신문 산업의 미래에 대한 깊은 식견도 있었다.
다소 딱딱한 문답이 계속되다가 기자 생활을 할 당시에 대해 질문하자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는 동아일보에서 1995년부터 98년까지 취재기자로 일했다. 사회부 소속이던 97년에는 한국기자협회가 시상하는 한국기자상도 받았다.
기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5·18 이산가족 사건’을 소개했다. 김재호 ‘기자’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와중에 가족과 헤어졌던 청년과 부모를 상봉시켜준 것이다. 사회부 내근을 하던 1996년 어느날, 농아인 한 청년이 찾아와 부모를 찾아달라고 호소했다. 그 청년은 자기 본명도 정확한 나이도 몰랐다. “아버지가 육손이었다”는 기억만 되뇌었다. 주위 선배들은 “기사를 써도 찾기 힘들다”며 냉소적이었지만 결국 김재호 회장의 기사를 본 부모가 연락을 취해와 눈물의 상봉을 했다. 알고 보니 부모가 아들을 특수학교에 입학시키려 광주에 왔다가 5·18 때 잃어버린 것이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김 회장은 스트레스가 정 심하면 체력단련장을 찾는다고 했다. “무거운 운동기구를 들면서 기합 소리를 내면 스트레스도 풀린다”고 말했다.
선친인 고 김병관 회장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다. 김 회장 생전 모습에서 언론인으로서 갖춰야 할 많은 것을 배웠다는 그는 일화를 소개했다. “아버지께선 신문을 정말 이 잡듯이 꼼꼼히 보셨습니다. 동아뿐 아니라 많은 신문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비교하시면서 읽으셨어요. ‘신문을 저렇게 봐야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또한 “김병관 회장이 16년 전 신문협회장 시절 ‘협회장 소속사가 손해를 봐야 협회 운영이 잘 된다’고 한 말이 기억난다”며 이를 명심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경영상 이익이 나도 사주가 배당을 받지 않고 사내에 유보하는 전통이 있다. 배경이 궁금했다. “창간 초창기에 한 주주가 ‘이익이 생겨도 배당을 받지 않겠다’고 소신을 밝히면서 시작된 전통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주도 월급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한편 김 회장은 동아투위 문제와 관련해 “대법원 판결로 완료된 사안”이라고 답했으며, OCI 주식거래 의혹에 대해서는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했으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