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이 화석 속에서 희망 하나 건질 수 있을까"

[모노극] 흐린 날의 석고 두개골

젊은 시절 내가 꿈꿔왔던 거. 그게 사라져버린 거야.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와주고 싶었지.
나의 사라진 열정, 지쳐 축 늘어진 정신….
이런 늙은 미래가 아니었다구!




   
 
   
 
핀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면 무대 중앙, 소파에 40대 중반의 기자로 보이는 사나이가 흰 석고 두개골을 안고 앉아 중얼거리고 있다. 무대 배경은 기자실을 암시할 수 있는 검은 천으로 미니멀하게 처리.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띠잉하고 머엉해. 어떤 자가 주사로 공기를 주입해놓은 거 같아. 속은 텅 비고, 세상에 남의 뇌를 훔쳐가는 놈이 있단 말인가? 나는 정보기관을 의심하지만, 알다시피 이젠 대기업들이 훨씬 무서운 존재잖아?

이게 내 문제야. (석고 두개골을 들여다보면서, 혹은 어루만지면서) 그것이 없다는 거.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 : 나의 사상이 없어졌어!
15년 전 면접시험 때 기자가 돼서 뭘 하겠느냐는 임원들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지. 싸, 싸우겠습니다. 낄낄 웃는 그들 앞에서 생각했어. 뭐가 잘못됐지? 싸우겠다는데?
그런데 말이야.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어. 보라구. (석고 두개골을 두드려보며) 텅 비어 있다구!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난다) 젊은 시절 내가 꿈꿔왔던 거. 저 명멸하는 구름 앞에서 내가 다짐했던 거. 그게 사라져버린 거야. 정부와의 타협, 불의 앞의 침묵, 자본과의 결탁, 아파트 전세금, 승진 누락, 생활난, 술 담배로 찌든 몸…. 그런 것 따위가 아니야. 아니라구.
내가 여기서 이루고자 했던 거, 특종 따위가 아니라, 목숨 걸고 하고자 했던 거. 그게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거야.

(갑자기 무대 중앙에 멈춰선다) 그런데 정말 그게 있기나 했던 걸까? 궁금한 건 그거야. 그게 있었느냐는 것. (석고 두개골을 노려보며) 그게 있었냐는 것…. 이 세상에서 너무 많은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와주고 싶었었지. 머리에 정의라는 푸른 띠를 동여매고, 동분서주했었지.

(이때 무대 좌측에서 행인 등장, 신문을 읽다 휙 던져버리고 무대 오른 편으로 사라진다. 그 신문을 주워들고) 어쩌면 정말 정신이 사라져 버린 건지도 몰라. 동료들은 하나둘 어디론가 떠나가고…. 편집국에 들어가 보면 빈 책상이 수두룩하고….

(그는 두개골이 빠개지는 듯한 고통을 호소하며 “그만, 그만, 그마아안!” 외치면서 정보기관을 비난한다. 아니 정부와 대기업을 비난한다. 잠시 후 소파에 축 늘어진 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야. 나의 사라진 열정, 지쳐 축 늘어진 정신…. 이런 늙은 미래가 아니었다구!

(이때 점점 소란하게 들리는 소리. ‘언론특보 물러가라!’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있다) 아직도 이 화석 속에서 빛나는 희망 하나 건질 수 있을까. 날이 흐리구먼….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그. 잠시 머뭇거리더니 석고 두개골을 무대 바닥에 힘껏 내리쳐 깨뜨려 버린다. 산산 조각난 석고상의 잔해를 보여주는 조명. 퇴장)

조명이 서서히 꺼지고 무대 배경 뒤편에 슬라이드 화면으로 함성을 지르는 젊은 기자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다음 장면으로 언론특보 출신 언론사 사장들의 얼굴. 그리고는 카메라, 대(大) 자로 누워버린 푸른 나무를 클로우즈업한다. 암전.

※황지우의 시 ‘석고 두개골’ 각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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