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소녀, 그녀는 지금 어디에…

취재이야기 공모 [우수상] 한국일보 고찬유 기자(사회부 시경 캡)



   
 
  ▲ 고찬유 기자  
 
2002년 초입 그녀의 부고를 접했다. 아뜩했다. 우린 실로 애증의 관계였다. 그녀는 사랑 받길 원했으나 난 그녀를 미워했다. 몇 개월의 짧은 연, 우린 쉼 없이 다퉜다. 뜻대로 되지 않는, 늘 엇나가는 그녀에게 내질렀던 원망이 불현듯 죄스러웠다. 왜 더 사랑하지 못했을까, 자괴가 밀려왔다. 기억의 수면 아래 잠겨 있던 그녀의 말이 솟아올랐다. “오빠는 나 여자로 안 보이지? 이래 봬도 ‘손님’들한테 인기 많았어, 나!” 정작 발화(發話)할 당시엔 아무런 울림도, 대꾸할 여지도 주지 않았던 그녀의 자문자답이 왜 하필 그녀의 죽음이 전달되는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걸까. 할 만큼 했다고 자위했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그런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그게 주검이든, 흔적이든. 얽힌 실타래를 풀려면 1년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2001년 4월 어느 토요일 오후 그녀는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남겼다. 신문사에 예고 없이 걸려오는 제보전화가 그렇듯 내용은 거창했다. ‘미아리텍사스의 비리를 폭로하겠다.’

다음날 얄팍한 제보철의 정보를 확인하는 일은 내게 떨어졌다. 대충 별거 아니라는 감이 왔지만 기사 아이템 하나 발제하지 못한 터라 그녀가 있다고 알려준 정신병원을 찾았다. 면피나 해보려는 심산으로.

술 마약중독 치료 정신병동은 굳게 닫혀 있었다. ‘면회는 친척만 가능’이란 안내글을 보고 금세 ‘사촌오빠’로 둔갑했다. 150㎝도 안되 보이는 작은 키, 마른 몸. 말까지 자꾸 샜다. 마약에 찌들어 혀가 굳은 탓이란 걸 뒤늦게 알았다.

구체적인 제보내용은 역시나 확인 불가한 것들이었다. 더구나 그녀의 몰골은 상대에게 편견을 주기에 충분했다. 말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헛걸음을 했다는 생각이 뇌리를 채우는데, 문득 제보가 아니라 그녀가 보였다.

초등학교 중퇴, 윤락과 마약, 파탄 난 가정, 암투병 중인 아버지, 그리고 녀석의 꿈. 머릿속에선 이미 기사가 작성되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잡고 본격적으로 ‘그녀’에 대해 물었다. 녀석이 얼기설기 쓴 일기 몇 권도 빌렸다. “잘 지내고 있어, 어디 가지 말고. 다시 올게.” 어느새 난 그녀의 사촌오빠 행세를 하고 있었다.

꼼꼼히 그녀의 일기를 읽었다. 기사에 녹일 만한 그럴싸한 사연이나 코멘트가 있을까 하는 얄팍한 심정과 사무적인 태도로. 어법과 맞춤법은 대충 무시하고 괴발개발 써내려 간 삶의 기록은 차츰 나를 당혹시키더니 종국엔 분노케 했다.

다시 그를 만났다. 가여운 맘은 접고 사실관계 추궁에만 집중했다. 덤덤한 그의 목소리, 속상했다. “어떻게 이런 일을 당하고도 참았어.” “방법이 없잖아요. (언론사에) 전화 많이 했는데, 실제 찾아온 사람은 오빠가 처음인 걸요. 오빠도 솔직히 믿지 않았잖아요.” 대꾸할 거리가 없었다.

다음날 한국일보엔 ‘18세 소녀의 마약 윤락 고백 “다시는 지옥에 안 갈 거야”’라는 제목의 기사가 사회1면 머리에 실렸다. 기사에 쓴 것처럼 녀석의 충격적인 고백에는 마약과 미성년 노예매춘, 인신매매 등 우리 사회의 끔찍스러운 단면이 모두 다 담겨 있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그토록 많은 메일과 전화,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미국에서도 그를 돕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미성년자 성 매매라는 소재가 지닌 휘발성과 녀석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측은지심을 불러왔기 때문이리라.

작은 성취에 우쭐해졌다. 기사 하나로 누군가의 삶을 구원한 거라, 녀석을 돕고 싶다는 단체와 정성을 연결해주면 그만이라 여겼다. 그러나 교만은 모든 걸 어긋나게 했다. 누군가가 자신 옆에 있다는 걸 확인한 녀석은 집요했다. 수시로 전화를 걸어 나를 괴롭혔다.

“약을 하고 싶어.” “너를 후원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야지.” “한 번만, 딱 한번만.” “조금만 참아봐, 곧 괜찮아질 거야.” 어르고 달랬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녀석은 병원에서 쫓겨났다. 다시 입원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병원도, 녀석도 원치 않았다.

녀석에게 밥을 사주고 알량한 조언을 해주는 게 전부였다. 사실 귀찮았다. 할 일은 많은데, 녀석은 시도 때도 없이 괴롭혔다. 그때 난 비겁했고 게을렀고 이기적이었다. 녀석이 금단현상 때문에 힘들어할 때 내가 한 일이라곤 고작 “참으라”는 말 뿐이었다.

“오빠도 똑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괴롭기보다 후련했다. 그리고 녀석은 한동안 연락을 끊었다. 줄기차게 오던 전화가 오지 않자 서운했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다시 녀석의 목소리를 들은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딱 한마디였다. “아저씨(마약 공급책)가 온 것 같아, 무서워요.” 대꾸할 겨를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이틀 뒤 수화기 너머 녀석은 약간 들뜬 목소리였다.

마약 공급책에게 끌려가 다시 마약을 했다는 것, 약에 취해서 정신이 없다는 것, 마약 공급책을 피해 지방으로 내려가겠다는 것이 요지였다. “일단 만나자”고 설득했지만 녀석은 “갈 곳이 없다”고 절규했다.

아마 그 즈음이었으리라. 녀석을 기사 소재가 아닌 한 인간으로 바라본건. 회사에 연락을 하고 급한 대로 2보 ‘미아리 소녀, “갈 곳이 없어요”’를 썼다. 그리고 녀석을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녀석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한 뒤 기다렸다.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만한 곳도 알아봤다.

다행히 기사를 접한 대검찰청에서 연락이 왔다. 마약자수기간을 활용해 녀석을 자수 처리키로 하고 재활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녀석의 팔을 끌다시피 해 대검으로 갔다. 하도 징징대서 조사받는 내내 곁에 있어야 했다. 마감은 다가오는데 말이다.

어렵게 조사를 마친 뒤 녀석을 남겨두고 왔다. 든든한 울타리가 생겨 뿌듯했다(‘미아리 소녀, “이젠 울지 않을래요”’. 부디 잘 자라서 요리사의 꿈을 이루길 바랐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 가늠할 수 없으나 꼭 지켜보다가 네 번째 기사를 쓰리라.



   
 
   
 
속절없는 바람은 이내 깨졌다. 아니 마약중독은 가혹했다. 한 달도 안돼 다시 녀석과의 지루한 전쟁이 시작됐다. “약 하고 싶어 못 참겠다”고 울먹이는 건 다반사, “약 하러 간다”고 협박까지 했다. 사촌오빠 행세가 아니라 아예 사촌오빠가 된 기분이었다. 녀석을 설득하는 작업은 외줄타기처럼 위태로웠다.

결국 어느날 “약을 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불같이 화를 냈다. 아무리 애써도 틀어지기만 하는 녀석에게 실망을 했고,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녀석과의 관계가 속상했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던 녀석의 전화는 이후 끊겼다.

몇 달 뒤 어느 신문 1면을 장식한 한 소녀의 뒷모습이 당겼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관련기사를 보곤 어이가 없었다. 녀석이었다. 몸을 파는 대신 사연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해당 기사를 쓴 애꿎은 기자가 미웠다. 배신감이 밀려왔다. 녀석이 지금껏 했던 말과 행동이 죄다 거짓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녀석을 지웠다.

이듬해 녀석의 부고는 대검이 전해줬다. “혹 ○○○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셨나요.” 상대는 녀석의 죽음을 알렸지만 도리어 봉인된 기억은 녀석을 살려내고 있었다. 마음을 추스른 후 사실확인에 나섰다. 암 투병 중인 녀석의 아버지와 친구들에게 물었지만 알지 못했다.

간간이 녀석이 떠올랐다. 기자로서 충실했는가, 인간으로서 진실했는가, 그의 죽음에 책임은 없는가, 애초부터 녀석을 인간이 아닌 기사소재로 본 건 아닌가. 아무리 묻고 후회하고 변명해도 이미 늦었다.

다만 취재방법과 취재원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선 나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어둡고 외진 곳을 바라보는 눈을 넓혔고, 사회구조 전체를 아우르진 못하더라도 한 사람의 사연을 소중하게 여기게 됐다. 따지고 보면 녀석 덕에 ‘앵벌이 기자’라는 별명도 얻었다.

참, 녀석과의 인연은 징그럽게 질겼다. “진짜 걱정했어요?” 불현듯 걸려온 전화는 낯익은 목소리를 귓전에 내려놓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녀석은 상대의 침묵을 틈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대략 난감이었다.

녀석의 다짐을 받아두고 싶어 만났다. 얼굴은 좋아 보였고, 말도 덜 샜다. 반갑고 고마웠다. 정말 죽었다 살아온 것처럼. 냉정하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다른 신문 1면을 장식한 것부터 죽었다고 알려진 사연까지 괴이한 사건들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제 입으로 말한, 한국일보에 실린 사연의 진위도 캐물었다. 한참이나 들어야 했다.

기억에 남은 건 몇 마디 말과 녀석의 눈물뿐이다. “사연은 진짜다. 아빠한테도 확인하지 않았느냐”, “감추고 싶은 얘기를 해줘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줬다.”, “세상이 나쁘다고 욕하는 사람들(포주와 마약공급책을 이른다), 그들은 최소한 내가 몸을 팔고 마약을 하는 동안엔 잘 대해줬다”, “당신이 날 책임질 수 있나”, “오빠도 똑같아” 등. 가슴을 후벼 팠다.

몰아붙이기만 한 게 미안했는지 끝말은 이랬다. “그나마 내가 죽은 줄 알고 여기저기 연락하고 걱정해줘서 전화한 거야.”

변명을 해야 했다. “마약중독이 그토록 무서운지 잘 몰랐다”, “네가 올바르게 되길 바랐다”, “다른 일이 바빠서 잘 챙겨주지 못한 거다”, “딴에는 있을 만한 곳을 알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느냐” 등. 유치하지만 진심을 담았다. 그리고 꼭 안아줬다. 사촌오빠 행세가 아니라 사촌오빠가 된 듯했다. 아직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했다.

그날을 끝으로 더는 만나지 못했다. 녀석은 “걱정하지 말라”고 떠났다. “돈을 많이 벌 것”이란 얘기도 한 것 같다. 어차피 더는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았다. 시원섭섭했다. 녀석의 목소리를 듣는 게 그토록 괴롭더니 그리웠다.



   
 
   
 
2년이 흘렀다. 부서를 두 번이나 옮긴 뒤였다. 매일 밤 취재원을 만나는 것보다 야구를 보는 게 일이었다. 사람이 무섭더니 그리웠다. 경찰기자의 더께가 앉아서일까? 바쁘고 무료한 나날의 정적을 깨는 벨이 울렸다.

“나 누군지 알아요?”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숱한 밤을 괴롭히던 그 새는 목소리, 할말을 잃었다.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건가, 다시 악몽이 시작되는 건가.’ 앙금이 폴폴 올라오나 싶더니 웃음이 났다. 두근두근 가슴도 뛰었다.

수화기너머 침묵이 못 견디겠다는 듯 녀석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나 ○○(지방도시)야, 다시 병원에 다니고 있어. 이제 약 안 해. 중입검정고시도 준비해. 하하하.” 녀석의 웃음은 한결 가벼웠다. 어찌 참았을까 싶게 자랑하고파 안달이 난 목소리였다.

몇 번이고 “진짜냐”고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쉬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진짜야, 진짜!” 칭찬을 해줘야 하는데 말은 자꾸 빗나갔다. 녀석도 그럴 줄 알았던 모양이다. 곁에 있던 친구까지 바꿔줬다. 일종의 교차취재를 한 뒤에야 안도했다.

전화 한 통이 그토록 반가웠다. 녀석의 마지막 자랑은 “남자친구가 생겼다”였다. 성격은 어떤지, 뭐 하는 놈인지 꼼꼼히 물었던 것 같다. 일종의 질투였을까? 묘하다. 놀라운 관계의 경험이었다.

녀석과의 진짜 마지막은 검정고시 합격 소식이었다. “밥 얻어먹으러 서울 온다”더니 아직 연락이 없다. 오려니, 오려니 하다가 머리에서 지워졌다. ‘미아리’ ‘퇴폐’ ‘미성년 성매매’ ‘마약’ 같은 단어가 가끔 지면에 실리면 기억의 창고를 들썩이는 바람처럼 왔다 사라지는 정도.

사실 녀석과 다시 만나면 검정고시 합격 과정을 또 기사로 쓸 궁리를 하고 있었다. 녀석이 처음 선사한 감동의 순간마저 일로 여기는 투철한 직업정신의 발로랄까. 과했다. 그래서 다시 만나지 못한 게 그리 나쁘지 않다. 기괴했지만 아름다웠던 관계, 기자가 아니었다면 나눌 수 없는 인연이었으리라.

다만 늘 외롭고 엇나가던 그녀가 지금은 잘 살고 있을까 염려스러울 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걱정을 덜어줬다. “한정된 실망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무한한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툭, 아직도 수화기너머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긴장한다. 휴대폰이 없던 녀석은 늘 공중전화로 날 찾았다. 툭, 서른 즈음 그녀는 지금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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