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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조정 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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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지난 2003년 이라크 전쟁 취재후기입니다. SBS 보도국의 조 정·윤창현 기자, 카메라팀의 태양식·김흥기 기자, 파리지국의 허경모씨 등 5명이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 이라크땅을 취재했습니다. 당시 틈틈이 취재기를 써 서울의 동료들에게 보냈고 여기에 후일담을 덧붙여 정리한 것입니다.5백 유로를 주고 산 황천길우리들의 작은 모험은 끄레송이라는 프랑스 친구를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끄레송은 프리랜서 카메라맨으로 프랑스인 특유의 상냥한 미소를 지녔습니다. 취재팀은 쿠웨이트 쉐라톤 호텔 APTN 부스에서 이라크 남부에서 찍은 영상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모래먼지가 더덕더덕 붙은 티셔츠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이라크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연락처를 주고받고…. 우리는 그날 밤 끄레송의 호텔에서 다시 은밀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거래는 의외로 쉽게 이뤄졌습니다. 끄레송은 한 달여 만에 찾아낸 이라크행 비밀루트를 조니워커 5병에 팔았습니다. 술이 금지된 이 나라에서 싸구려급 위스키 한 병을 구하는 데도 100달러가 필요합니다. 끄레송은 이라크에 있는 동료들에게 위스키를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달러 대신 유로를 갖고 있던 우리들은 끄레송의 모험담을 듣는 대가로 기꺼이 500유로를 내줬습니다.
이라크에 잠입하기 위해서는 검문소를 무려 다섯 곳이나 통과해야 합니다. 우선 쿠웨이트 국경까지 두 곳, 비무장지대의 3중 철책에도 어김없이 체크포인트가 하나씩 있습니다. 끄레송은 1번과 2번 검문소 통과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국경으로 가는 도로에서 사막으로 빠져 나간 뒤 송유관이 묻힌 곳을 따라가면 검문소 두 곳을 건너 뛸 수 있다는 것입니다. 500유로를 손에 쥔 끄레송의 눈빛이 점점 빛을 발하기 시작할 무렵, 내 마음은 벌써 이라크 남쪽 벌판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준비는 한치의 오차없이 치밀하게 이뤄졌습니다. 힘 좋다는 미쓰비시 파제로 지프를 빌렸습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오인 사격을 피하기 위해 ‘TV’라고 크게 써 붙였습니다.
25리터들이 휘발유 4통과 비상식량, 생수 두 박스, 방탄조끼와 철모를 착착 짐칸에 실었습니다. 시험을 마친 비디오폰과 생방송에 대비해 미리 써 둔 원고까지, 살면서 무엇을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해 본 기억은 없습니다. 실로 몇 년 만에 두손 모아 기도를 했습니다. 동료들과 마지막 회의를 가진 뒤 조용히 호텔방으로 올라 왔습니다. 내가 왜 지금 이라크에 가야 하며, 가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이곳에 오기 전에 결심한 것들을 다시 가슴에 새겼습니다. 서너 시간 얕은 잠을 청하는 사이에 약속한 새벽 3시는 성큼 다가 왔습니다. 사막의 짙은 어둠을 가르며 다섯 명이 탄 지프는 거침없이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송유관을 타고 국경을 넘다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새벽…. 하지만 쿠웨이트 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지프의 전조등을 꺼버렸습니다. 그리고 운전석 GPS의 불빛이 새나갈까봐 가져간 깃발로 이마저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장님 문고리 잡듯 곳곳에 널린 모래 웅덩이들을 피해가며 송유관의 주황색 말뚝을 따라 조심스럽게 국경으로 접근해 갔습니다.
멀리 두 번째 검문소의 불빛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이곳만 들키지 않고 돌아가면 국경 비무장지대까지는 일사천리. 순찰차 불빛을 살피며 북상하는 순간, 갑자기 어디서 개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차 뒤를 보니 근처 외딴 농가 주변에 있던 들개들이 그야말로 개떼처럼 따라붙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들키면 모든 것이 끝장. 위험을 무릅쓰고 속력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국경 비무장지대로 통하는 포장도로로 올라서자 이번에는 쿠웨이트 순찰차 불빛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밟았습니다. 시속 160Km 이상으로 5분 정도 달린 끝에 겨우 순찰차를 따돌렸습니다. 멀리서 동터오는 걸프만의 붉은 여명을 바라보며 한참을 달렸습니다.
이번에는 비무장지대로 통하는 쿠웨이트 검문소. 밤샘을 한 보초병에게 “US ARMY PRESS!”라고 외쳤더니 북쪽이 매우 위험하다며 눈치채지 못하고 통과시켜 줍니다. 곳곳에 영국군과 미군의 야전기지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취재진의 긴장도 더해 갔습니다. 멀리 움카스르 항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전에 없던 영국군 검문소가 국경 바로 앞에 설치돼 있었습니다. 키가 멀대같이 큰 영국군 보초병과 30분이 넘게 실랑이를 벌였지만, 군의 호위를 받는 프레스 투어가 아니면 안된다며 막무가내로 취재팀을 밀어 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돌아가는 척 차를 돌린 우리는 감시를 피해 국경선을 따라 난 비포장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울퉁불퉁한 도로 때문에 엉덩이 근육이 뭉치기 시작할 즈음 국경 출입문 한 곳이 활짝 열린 채 방치돼 있었습니다. 이제 탱크가 빠질 정도로 깊게 파인 참호만 넘어서면 이라크 땅. 두 시간 고민 끝에 취재팀을 대신해 운전을 해 주기로 한 파리지국 직원 허경모씨는 탱크용 철교를 찾아내는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잠이 덜 깬 쿠웨이트 군이 손을 흔들며 취재팀을 환송해 주더군요. 붉은 태양을 빨아들이고 있는 이라크 땅이 보이기 시작하자 취재팀의 심장박동도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이라크 땅에 들어섰습니다.
한가로이 양 떼를 모는 가난한 농부들의 수척한 얼굴에는 전쟁과 굶주림의 상처가 깊게 배어 있었습니다. 전쟁의 현장에 들어섰다는 묘한 긴장과 가슴 한 구석에 연민이 교차하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바스라로 향하는 8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멀리 바스라와 바그다드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라크 민병대는 현대차를 몰았다바스라 하늘을 뒤덮은 검은 연기는 우리를 운명처럼 이끌었습니다. 위험구역 사프완을 빠져나온 취재팀은 바스라를 향해 속도를 높였습니다. ‘중동의 베니스’ 바스라로 향하는 길은 시원하게 잘 닦여 있었습니다.
전장에 들어 왔다는 사실이 두 눈을 통해 머리로 전달되자 이내 맥박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외제차가 넘쳐 나는 쿠웨이트와는 달리 도저히 움직일 것 같지 않은 낡은 차들만 간간이 곁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라크 사람들은 모두 총을 갖고 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손을 흔들며 우리에게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표정으로 봐선 반갑다는 인사같아 보였지만 지프에 달린 쿠웨이트 번호판이 신경 쓰였습니다. 차를 세우고 번호판을 떼냈습니다. 이라크 공기를 처음 마시는 순간 코끝이 탁 막혀 오는 감을 느꼈습니다.
기름 타는 냄새와 화약의 매운 냄새가 우리를 다시 긴장시켰습니다. 포탄을 들고 마이크를 잡기는 처음입니다. 바스라와 사프완의 중간지점, 개전 당시 처음으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다리를 지나자 전투의 흔적들이 나타났습니다. 불에 탄 군용트럭과 전차들, 고철이 된 이라크 탱크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지 오래였습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차에서 내린 일행은 어느새 각자의 임무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카메라가 돌고, 생생한 그림들이 디지털 테이프 위에 고스란히 새겨졌습니다. 후배 윤창현 기자가 먼저 불탄 전차 앞에서 스탠딩을 하고 제 차례가 왔습니다. 도로에 널려 있는 불발탄들을 소도구로 삼기로 했습니다. 다 자란 무 크기의 불발탄 하나를 어렵게 무릎 앞에 세웠습니다.
전차를 박살내고 허물을 벗은 진짜 탄피도 그 옆에 갖다 놓았습니다. “양식이 형, 빨리 합시다….” 뷰 파인더에 힐끔 눈을 맞춘 베테랑 카메라 기자의 입에서 독설이 튀어 나왔습니다. “정아, 그림이 약하다. 옆에 있는 포탄 한 개만 더 집어 와라….” 쓰펄…. 시킨대로 잘 익은 불발탄 한 발을 앞으로 옮기는 동안 구슬 만한 식은땀이 내 등줄기를 타고 있었습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바스라 시내를 향해 거침없이 달렸습니다. 이라크군이 곳곳에 파둔 기름 구덩이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했습니다. 도심 가까이에 다가설수록 차창 밖으로 전혀 손상되지 않은 사담 후세인의 대형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스라 시내는 미·영 연합군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5분쯤 행인들과 눈을 맞추고 달리는 사이 낯익은 차 한 대를 발견했습니다. 현대차 마크가 새겨진 초록색의 낡은 순찰차는 전속력으로 달려와 우리를 가로막았습니다. 차에서 내린 이라크 군인 두 명이 험악한 표정으로 소총을 들이대며 무언가 말을 걸어 왔습니다….
NORTH, SOUTH, 무슬림우리가 끌려 간 곳은 말로만 듣던 이라크 민병대의 아지트였습니다. 구소련제 AK-47소총을 겨눈 초록색 군복의 이라크인들은 살기가 잔뜩 드리운 험악한 눈빛이었습니다. 창문을 열고 카메라를 거칠게 끌어당기는 순간, 옆자리에 앉았던 영상취재팀 김흥기 기자의 손아귀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죽어도 카메라는 빼앗길 수 없다는 투철한 직업정신이 이 순간에도 발휘되다니…. 나는 얼른 카메라를 주라고 말했고, 우리는 카메라를 빼앗기고 무장병력에 앞뒤로 포위된 채 바스라 시내로 연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바스라 시내의 모습은 상상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전쟁의 상처로 폐허가 됐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너무나 차분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고, 다만 무장한 민병대원들만이 전시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사담 페다인들은 겉보기에도 무소불위의 엄청난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연행해서 두세 곳의 아지트를 끌고 다녔는 데, 신호위반은 기본이고 역주행을 밥먹듯 하며 바스라 시내를 질주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막지 못했고, 정당한 운전자들이 오히려 겁을 먹고 길을 비켜주는 모습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취재팀이 페다인 민병대의 아지트에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녹슨 쇠창살로 막힌 감방이 펼쳐졌습니다. ‘여기에 갇히는구나….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잠시 스치고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페다인들은 우리를 가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책임자의 사무실로 데려가 예상 밖의 친절을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웃는 표정으로 끊임없이 담배를 권했습니다. 8년째 담배를 끊어 온 저는 처음 몇 번을 사양했지만, 결국 그들이 건네는 까만 담배갑 속의 ‘수메르’라는 담배를 피워 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속 사양하다간 민병대 요원들을 자극할 수도 있었고,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을 담배 한 가치로 달래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그들의 전통 빵과 함께 페다인 책임자가 뇌물(?)로 받은 듯한 양젖 치즈 한 통을 사물함 깊숙한 곳에서 빼서 함께 주더군요. 그들은 우리가 남한 출신인지, 북한 출신인지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일부 민병대들은 우리가 남한 출신이라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표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위기를 모면하고자 슬쩍 양다리를 걸쳤습니다. “I’m from South, But my mother from North” 옆에서도 거들었습니다. “My brother is muslim, he prays for Iraq in Korea.” 졸지에 부모의 고향과 형제의 종교까지 바꿔버렸지만, 효과는 톡톡히 봤습니다. 영어를 다 알아듣지는 못하는 그들도 ‘무슬림’이라는 한마디에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우리에게 바스라 내의 폭격현장과 부상자들까지 인터뷰를 하게 해 주겠다며 호의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철없는 기대도 잠시…. 억류된 기자들은 이미 정해진 처리방식이 있었습니다.
민병대 책임자는 우리가 내일 바그다드로 압송돼 조사를 받은 뒤, 요르단이나 시리아로 추방될 것이라고 통보했습니다. 바그다드! ‘이렇게 바그다드를 보게 되는 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바스라에서 바그다드까지는 5백Km. 가는 길목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이라크 민병대에 억류된 우리는 이제 공중이나 머리 뒤에서 날아 올 미군의 폭탄과 총탄을 피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 버렸습니다. 이어 우리는 바스라에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키가 1백90m쯤 되고 안소니 퀸을 그을려 놓은 듯한 인상의 아부 알리라는 이라크 법무성 직원에게 인도돼 폭격 맞아 폐허가 된 쉐라톤 호텔로 이송됐습니다.
우리가 그날 밤을 꼬박 샌 이유바스라에 하나 뿐인 호텔 쉐라톤은 뽀얀 먼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한 차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는지 유리창은 깨져 있고, 벽에는 총탄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호텔에 도착하자 감시원 아부알리만 남고 총을 든 민병대원들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투숙객 한명 없는 텅빈 공간에 적막감이 흘렀지만 우리는 ‘호텔’이 사람들에게 주는 풍요로운 느낌을 잠시나마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병은 또 나타났습니다. 이미 한번 불쾌한 인연을 맺었던 그 ‘불발탄’입니다. 로비에 들어선 일행을 제일 처음 맞이한 것은 후세인의 대형 사진, 그 옆에는 높이 4m쯤 되는 통유리창이 산산조각 부서져 있었습니다. 깨진 유리가 만드는 예각을 따라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순간, 숨이 딱 멎고 말았습니다. 정원 한가운데,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LP가스통 만한 불발탄이 화단에 꽂힌 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부알리는 큰 덩치와는 달리 무척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초대형 불발탄에 넋이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능청스럽게 호텔 자랑을 해댑니다. 건축양식이 특이하다, 마음껏 샤워를 즐길 수 있다…. 시키지도 않은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 놓았습니다.
사실 호텔 자체는 독특하고 훌륭했습니다. 휴양지에서나 볼 수 있는 개방형 구조로, 동서남북에 객실용 건물을 세우고 그 가운데 정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병풍처럼 사방으로 둘러친 건물 한복판에 파괴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폭탄이 떨어진 것입니다. 아마도 그 폭탄이 제대로 터졌다면 바스라의 호텔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겁니다.
우리는 연합군 전폭기 조종사의 믿지 못할 사격술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습니다. 방 배정에 앞서 마지막 조사를 받았습니다. 아부알리는 통역관이라고 소개했지만 대머리에 미국식 영어를 쓰는 그 사람은 정보기관원 같았습니다. 얼마나 궁금한 게 더 남았는지…. 지칠대로 지친 우리는 그 남자가 정하는 순서대로 한 사람 한 사람씩 프런트데스크 뒤편 작은 사무실로 불려 들어갔습니다.
출생지와 소속, 가족관계같은 기본사항에서부터 바스라로 오는 길에 무엇을 보았는지까지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몇 시간의 조사가 끝난 뒤 드디어 하루를 묵을, 정확히 말하면 하룻밤 갇혀 있을 방이 배정됐습니다. 역시나 수도꼭지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허연 물이 나와 씻기를 포기하고 잠시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중화기가 내뱉는 파열음을 듣고 있으면 온몸의 근육이 탁 풀리는 감을 느낍니다. 호텔방에서 평화로운 바스라 시내 풍경을 내려다 보고 있을 즈음 동쪽으로부터 콩 볶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두루루룩, 타당 타당….” 예비군 훈련장에서 듣는 K-2 소총의 서툰 솔로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듀엣인가 했더니 트리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탕,탕….투루룩 투루룩….꾸쿵….” 한 10분 쯤 정신없이 절정을 향해 치닫다가 “꽈과광 !” 땅이 흔들릴 정도의 큰 소리가 나면 잠시 조용해지는 식으로 연주는 계속됐습니다.
침이 말랐습니다. 모두 얼굴이 노래졌습니다. 아랫배와 다리에 점차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방 안쪽으로 피하자. 창문으로 유탄이 날아 올지 모른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방에는 커텐을 치기로 했습니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공포의 ‘채널 2’를 지우고 싶었습니다. 잠시 멍해진 머리를 다시 깨운 우리들은 바스라가 사실상 점령됐다고 거짓 보도를 일삼은 서방 언론들을 입으로 능지처참했습니다.
‘신밧드’ 레스토랑에서의 최후의 오찬문 밖에서 사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반대쪽 객실 입구에 서양 남자와 동양 여자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음씨 좋은 감시원 아부알리는 그들과의 면회를 허용해 줬습니다. 도미니크. 아일랜드 출신의 긴급구호 활동가였습니다. 그쪽 일행도 다섯 명.
아일랜드에 본부를 둔 구호단체 ‘CONCERN’의 멤버 4명과 쿠웨이트에서 동행한 인도 출신 운전기삽니다. 그들 중에는 입양아로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여성이 끼어 있었습니다.
콴리라는 이름의 그녀는 수줍은 한국여성의 미소를 가졌으며 파리에 혼자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미니크 일행도 긴급구호 활동을 하기 위해 바스라에 왔다가 길을 잘못 들어 민병대에 체포된 신세였습니다. 해가 저물자 전폭기의 본격적인 폭격이 시작됐습니다. ‘불안과 공포’도 나누면 반이 된다고,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어 내일 새벽의 바그다드길을 걱정했습니다.
다음날 상황은 급박하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취재팀 어느 누구도 상황을 비관하거나 서로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들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시시각각 가슴을 조여 들어오는 폭격과 총성을 들으며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서로를 의지하며 잠을 청해 봤지만, 서로의 뒤척임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출장 전날, 전쟁터로 가는 아빠가 다치면 안된다며 아끼던 반창고를 건네던 아들 녀석이 떠올랐습니다. 신혼인데도 위험한 종군 취재를 감행한 윤창현 기자. 남편을 떠나 보내기 싫었던 새댁이지만 막상 출장날이 되자 돌아가신 장인이 아끼시던 묵주를 손에 꼭 쥐어주었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차라리 빨리 바그다드로 떠나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우리는 아부알리에게 빨리 출발하자고 재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부알리는 바그다드로 가는 길이 이미 끊겼다며 길이 열릴 때까지 바스라에 더 억류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때부터 아부알리의 표정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뭔가 상황에 변화가 있다는 감을 잡았지만, 바깥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불안한 기다림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디기만 한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의 불안감은 조금씩 커져갔고, 자신감은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밧드’라는 이름의 큼지막한 레스토랑에서 아일랜드 구호요원들과 같이 점심을 청해 봤습니다. 레스토랑은 회백색의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고, 깨진 유리 건너 정원엔 거대한 불발탄이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한 테이블의 먼지를 닦아낸 뒤 계란 프라이 2개씩을 식사라고 주더군요. 위장 속까지 이미 불안과 긴장으로 적당히 간이 된 공포가 가득 차서 전혀 허기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먹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바스라 쉐라톤의 최후의 오찬은 끝이 났습니다. 오후가 되면서 미-영 연합군의 공습이 점점 호텔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다급해진 아부알리가 자리를 오래 비운 것도 그 즈음이었습니다.
탈출이다! 미친 놈의 기자정신홀로 남아 호텔을 지키던 매니저가 우리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넵니다. “당신들 잘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지금 군과 페다인 민병대가 바스라 외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어요.. 영국군이 바스라 도심으로 진격해 오고 있답니다.” 매니저도 곧 도망갈 태세였습니다. 우리는 매니저를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바스라는 영국군에 완전히 포위됐으며 서서히 무정부 상태로 들어서고 있다고 얘기를 하더군요.. 하지만 바스라 시내 길을 전혀 알 수 없었던 우리는 그 친구에게 외곽 도로까지 빠져 나갈 길 안내를 부탁했습니다. 이라크인들에겐 상당히 큰 액수의 사례도 약속했습니다.
이미 호텔 밖에는 약탈꾼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서너 명이 문 안으로 들어오려 시도했고 다른 한 무리는 우리에게 손짓하며 물을 달라고 하더군요. 조금만 더 지체하다간 이라크 민병대가 아니라 폭도로 변한 약탈꾼들에게 봉변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길 안내를 약속했던 호텔 매니저가 상황이 너무 위험하다며 시간을 끌기만 했습니다. 시시각각 약탈꾼들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있었고, 우리 가슴속의 심지도 점점 타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호텔 매니저는 약탈꾼들을 알리바바라고 표현했습니다. 폭도가 곧 들이닥칠 것이라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깥 상황을 살폈습니다.
맨발의 청년 10여 명이 무언가 소리치며 거리를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맞댔습니다.
“시내를 빠져 나가려면 전투현장을 지나야 할지도 모른다. 만일 총격이라도 받으면….”
“영국군이 진격해 호텔을 접수할 때까지 숨어서 기다립시다.”
“안돼요. 여기에 있다가는 약탈꾼들한테 봉변을 당하고 말 겁니다.”
잠시 의견이 엇갈렸지만 호텔 마당까지 들이닥치기 시작한 알리바바들의 기세에
우리는 망설임없이 탈출을 결심했습니다.
호텔 매니저에게 거액의 착수금을 쥐어 주고 자동차 키를 받았습니다.
감시원 아부알리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습니다.
하루 반나절 만에 차를 되찾은 우리는 탈출 때 혹시 있을지 모를 총격에 대비하기로 했습니다. 짐칸에서 방탄조끼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방탄조끼가 4개 뿐이었습니다. 촌음을 다투는 와중에 뜻밖의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흥기야, 빨리 입고 타라!” “아닙니다. 조 선배가 입으세요….” 옥신각신 검정색 방탄조끼를 두고 입씨름이 벌어졌습니다.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도 점잖은 후배 흥기, 나는 그 녀석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더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방탄조끼를 입지 않은 사람이 뒷자리의 가운데에 앉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흥기는 끝까지 창쪽 자리를 고집했습니다. 탈출하면서 한 컷이라도 더 찍겠다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맘에 드는 후배에게 결국 욕지거리를 하고 말았습니다. “저… 조 선배, 제가 혹시 잘못되면 저희집에 잘 말해 주세요.”
“야, 이 새끼야. 재수없는 소리 집어치우지 못해!” 천적을 만난 거북이처럼 머리를 최대한 방탄조끼 안으로 밀어 넣고 드디어 호텔문을 나섰습니다.
그 순간에도 총소리는 귓전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쏜살같이 움직이는 지프의 우렁찬 숨소리 만큼이나 우리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텅빈 거리에는 호텔 매니저 말대로 군복을 입은 민병대가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피난길을 떠나는 시민들이 서둘러 가재도구를 수레에 옮겨 싣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찍자, 찍어도 되겠다.” 하루 반 동안 잠자던 카메라는 이내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달려도 달려도 영국군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행인 것은 총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0년 같은 10분’, 그토록 긴박했던 순간은 지금도 또렷이 뇌리에 새겨져 있습니다.
하늘은 우리에게 또 한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됐어,됐어.영국군이야.” 창현이가 소리쳤습니다.
호텔 매니저의 계획대로 우회로를 돌아 도시 외곽으로 빠져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황급히 약속한 사례금을 창밖으로 내던졌습니다. 도미니크 일행과 작별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기수를 남으로 돌렸습니다. 영국군 탱크 여러 대가 오가는 도로에는 방금 전투가 끝났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얀 연기를 내뿜는 쇳조각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3백~4백m 전방에 낯익은 불빛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라이브 방송용 조명등’. CNN이 생방송 중이었습니다. 전장의 뽀얀 연기 속으로 보이는 노란 불빛은 마치 ‘생명의 신호’처럼 우리의 머리를 깨웠습니다.
순식간에 우리는 ‘빠삐용’에서 미친 놈의 ‘기자’로 돌변했습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약속이나 한 듯 각자의 임무에 몰입했습니다.
CNN을 비롯한 외신 5,6군데에서 바스라 최대의 전투를 취재하고 있었습니다.
쿠웨이트 쪽이 아니라 방금 전투가 벌어진 바스라 쪽에서 튀어 나온 우리들은 그들의 취재대상이 됐습니다. 우리가 겪은 일과 바스라에서 본 것들을 인터뷰해 줬습니다.
그리고는 폭격현장과 영국군 탱크의 바쁜 움직임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피난민 인터뷰와 스탠딩, 외신에서만 보던 잘생긴 영국군 대변인 크리스 버넌 대령도 만났습니다. 신기 들린 무당처럼 한 시간쯤 살풀이춤을 춘 취재팀은 국경을 향해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 쿠웨이트. 자유의 바람이 불다바스라 상공을 덮고 있는 검은 연기는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땀과 긴장으로 범벅이 된 우리 취재차량 안에는 안도의 긴 한숨이 하나둘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손을 모았고,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가슴 구석구석 박혀 있던 긴장과 불안이 조금은 녹아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밀려 들었습니다. 바스라 취재에 나선 30여 시간 동안 한 번도 느껴지 못했던 원초적 본능이었습니다. 1.5리터짜리 물 한통을 벌컥벌컥 나누어 들이켰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했던 긴장과 불안으로 채워져 있던 위장 속에 새로운 기운이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만 하루가 넘게 뜨거운 지프차 안에서 달궈진 뜨뜻미지근한 물이었지만, 세상에 태어나 가장 달게 마신 생명수였습니다.
우리는 거침없이 남쪽으로 달렸습니다. 도로 주변을 서성이는 헐벗은 아이들과 깊게 주름이 팬 아낙네들의 얼굴은 바스라로 들어설 때와 변함이 없었습니다. 조금 남쪽으로 내려오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그다드 방향으로 진군하는 미군 병력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리에 늘어선 사람들은 대부분 손을 흔드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손을 흔들던 이들은 차량이 지나가면 곧바로 손가락을 펴고 모욕과 저주를 퍼부어 대곤 했습니다. ‘이라크 자유작전’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전쟁은 결국 이라크 사람들에겐 이미 전쟁 같았던 일상에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을 더해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취재팀이 바스라를 빠져 나올 때쯤 이라크 남부 곳곳은 이미 무법천지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라크 민병대와 군 병력이 떠난 자리를 미-영 연합군 병력이 채우고 있었지만, 이들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자기 한 몸 챙기기도 힘들만큼 이미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넋이 나간 표정들이었습니다.
멀리서 비무장지대임을 알리는 유엔 표시와 쿠웨이트 군의 검문소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떠날 때 느꼈던 쿠웨이트의 후텁지근한 사막바람이 이렇게 청량하게 느껴지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산산조각이 난 유리창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모래바람을 맞으며 악몽같았던 40여 시간의 억류와 바스라 취재는 그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전했다위험한 전쟁터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억류와 탈출. 뜻하지 않았던 모험은 우리 5명에게 작은 선물도 주었습니다. 한 사람당 2천만원! 세금도 떼지 않은 억류 보험금이 지급된 것입니다.
저는 그 돈을 전세금에 보태려 마음 먹었으나 후배들과 술집 가는 일이 급해서 상당액을 그쪽으로 보냈습니다. 지금껏 사용하고 있는 골프채 한 세트 장만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목숨을 걸고 취재팀을 위해 운전해 준 파리지국의 허경모씨는 몇 해 전 SBS를 그만두고 파리에서 여행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받은 2천만원으로 승합차를 구입한 것이 밑천이 되었다는 후문입니다.
당시 출장 가방에 반창고를 싸 주었던 제 아들은 어엿한 고등학생이 되었고, 가족은 파리특파원이 된 아빠를 따라 프랑스에도 다녀왔습니다.
신혼의 단꿈을 이라크에서 꾸었던 윤창현씨는 판박이처럼 닮은 아들을 낳아 잘 키우고 있고, 카이로 특파원으로 선발돼 출국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격동의 이집트를 보면서 또 심장이 뛰기 시작하겠지요.
최고의 프로정신으로 귀한 영상을 담아냈던 태양식, 김흥기 기자는 지금도 영상취재팀의 기둥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기자로서 현장에 가까이 간다는 것은 본능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우리 5명은 2003년의 봄을 누볐습니다. 왜곡된 서방 언론을 제치고 현장에서 본 현실을 그대로 보도했고, 전쟁터의 아픔을 눈으로 보고 기사를 쓸 수 있었습니다. 기자정신과 동료애를 한껏 느끼게 해 준 이라크의 추억, 지금도 저를 깨우는 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