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케 할 것도, 진실된 것도 없다

한국기자협회 온라인칼럼[엄민용의 우리말글 산책]


   
 
  ▲ 엄민용 경향신문 엔터테인먼트부 차장  
 
성경을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를 응용해 ‘술이 너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우스갯소리처럼 ‘○○이 ○○를 자유케 하다’라는 표현이 참 많이 쓰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것도 무엇을 자유케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고요? 그야 뻔하지요. ‘자유하다’라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명사 뒤에 ‘하다’가 붙어 동사가 되는 말이 많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직 명사로밖에 쓰지 못하는 말도 많습니다. ‘자유’도 그중 하나입니다. ‘하다’가 붙을 수 없는 말인 것이죠.

‘자유케’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나를 자유하게 해줘”나 “자유하는 삶을 살고 싶어” 따위 표현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쓰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다들 “나를 자유롭게 해줘”라거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라고 쓰겠지요.

즉 “구속이나 속박 따위가 없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를 뜻하는 말은 ‘자유하다’가 아니라 ‘자유롭다’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로 써야 바른 표현이 됩니다.

“진실된 친구가 없어요”나 “그녀의 진실된 마음을 알고 싶어요” 따위 표현에서 보이는 ‘진실되다’ 역시 널리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실되다’도 바른말이 아닙니다. 반드시 ‘진실하다’로 써야 합니다.
우리말에서 접미사 ‘-되다’는 “(서술성을 가진 일부 명사 뒤에 붙어) ‘피동’의 뜻을 더하고 동사를 만드는 말” 또는 “(몇몇 명사, 어근, 부사 뒤에 붙어) 형용사를 만드는 말”로 쓰입니다.

이중 ‘진실되다’의 ‘-되다’는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로 쓰인 경우입니다. 그리고 우리말 형용사에 ‘거짓되다’도 있고, ‘참되다’도 있지요. 따라서 ‘진실되다’도 맞는 말처럼 보입니다. ‘거짓’과 ‘참’에 ‘-되다’가 붙어 형용사가 됐으니, ‘진실’에도 ‘되다’를 붙이면 형용사가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쉬운 거지요.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거짓되다’와 ‘참되다’가 가능한 것은 ‘거짓하다’와 ‘참하다’라는 형용사가 없기 때문이야. 그래서 ‘거짓’과 ‘참’이라는 명사에 ‘-되다’를 붙여 형용사를 만든 겁니다(여기서 뜬금없이 “생김새 따위가 나무랄 데 없이 말쑥하고 곱다는 의미의 참하다가 있잖아” 하고 딴죽 걸지 마세요. 그 ‘참하다’를 얘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진실’은 이미 ‘진실하다’라는 형용사가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 ‘진실한 친구’ 따위로 쓰는 ‘진실하다’ 말입니다. 이 때문에 굳이 ‘진실되다’라는 말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멀쩡한 형용사가 있는데도 그것을 쓰지 않고, 부질없이 ‘-되다’를 붙여 쓰는 말이 꽤 많습니다. ‘행복되다’도 그중 하나이지요. ‘행복된 인연’이나 ‘행복된 가정’ 따위로 쓴 표현을 종종 보는데, ‘행복하다’라는 형용사가 있으므로 ‘행복한 인연’이나 ‘행복한 가정’으로 써야 합니다.

‘명사+접미사’로 만들어진 말을 파생어라고 하는데요. 이들 파생어는 사전에 올라야 표준어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국어사전도 ‘진실되다’와 ‘행복되다’를 표제어로 올려놓지 않았습니다. 아무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엄민용 경향신문 엔터테인먼트부 차장>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