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 분신 한달 전
청계피복 참상 전한 기자 있었다

경향신문 故 기남도 기자로 밝혀져


   
 
  ▲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참상이 보도된 경향신문 1970년 10월 7일자 기사.  
 
“경향신문사 앞에서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던 전태일은 새로 나온 석간식문 한 장을 들고 미친 듯이 평화시장을 달렸다. 삼동회 회원들은 바라던 기사가 난 것을 확인하자 환호성을 터뜨리며 모두 얼싸안았다.”(전태일 평전 중)

1970년 10월 7일 경향신문 사회면 7면 머리기사로 실린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기사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로 잘 알려진 장기표 전태일재단 이사장은 “경향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이 보도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전태일에게 엄청난 기쁨과 희망을 줬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높이가 1.6m밖에 안 돼 허리도 펼 수 없는 2평 남짓한 작업장, 먼지 가득한 그곳에 15명 정도씩 몰아넣고 종일 일을 시켜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있는 어린 소녀들, 저임금에 휴일도 모른 채 일을 하고 있지만 건강검진은커녕 근로기준법에 담긴 노동자 기본 권리도 박탈당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는 박정희 정권에 맞섰던 경향신문 편집국의 의기와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실태조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기자의 이름을 게재하지 않는 관행이었던 탓에 이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본보 취재결과 노동청(현 고용노동부)을 출입하던 경향신문 사회부 고(故) 기남도 기자가 이 기사를 쓴 것으로 확인됐다. 기 기자의 후임으로 노동청을 출입했던 김명수 신아일보 회장은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 고(故) 전태일의 어머니 故 이소선 여사가 분신자살한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울고 있다. (전태일재단 제공)  
 
김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긴급조치로 인해 노동, 학원문제는 안보문제로 취급해 보도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기남도 선배가 기사화를 강력하게 주장해 데스크가 수용, 보도가 가능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편집국 간부들은 기사화에 난색을 표했지만 사회부를 중심으로 한 평기자들이 강력하게 항의해 결국 사회면 톱으로 빛을 봤다.

그러나 보도 이후 간부들은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와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의 항의를 받았고, 기관에 불려간 자리에서 “앞으로 유의하겠다”는 말을 하고 돌아왔다. 당시 사회부 사건데스크였던 강한필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은 “당시 신문의 입지가 보도할 만한 여건은 아니었기에 각오를 단단히 했다”며 “정권에서는 허를 찔린 셈이었다”고 말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도움도 컸다. 1970년 9월 중순 전태일은 동료와 동양방송 ‘시민의 프로’ 담당자를 만나 출연을 호소했지만 확실한 근거 없이는 방송이 어렵다는 말에 낙담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노동청에서 출입기자의 조언에서 한줄기 희망을 보았다.

평화시장 3만 노동자 중 30명 정도의 자료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많은 조사를 통해 진정서를 내보라는 것이었다. 전태일은 126명의 노동자의 실태를 조사한 뒤 10월6일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했고, 다음날 보도가 됐다.

삼동회 회원이었던 최종인씨는 “차 한 잔 내주며 따뜻하게 맞아주고 유별나게 태일이한테 잘해줬던 기자가 있었다”며 “노동청이 혼나야 한다며 평화시장의 사각지대를 알리겠다고 말해 참으로 고마웠다”고 말했다. 정황상 이 인물이 기남도 기자일 가능성도 있으나 최씨가 기자의 이름과 소속을 기억하지 못해 최종 확인되지는 않았다.

보도가 된 10월 7일. 삼동회 회원들은 경향신문사로 달려가서 신문 300부를 샀다. 가진 돈이 없어서 최종인씨는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 신문사 측에 담보로 맡겨놓은 뒤 신문을 들고 평화시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보도 이후 실태조사를 약속했던 노동청은 태도를 바꾸고 이들을 압박했다. 결국 전태일 열사는 11월 13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외마디 말을 남긴 채 분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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