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N 복직의 그날까지 우리 모두는 해직기자다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1945년 2월, 강의실 문을 열고 나온 뮌헨대학의 대학생들은 하늘에서 꽃잎처럼 흩날리는 유인물을 받아들었다. “나치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언론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라.” 웅성거리는 군중들 사이에서 두 남녀가 나치 교직원의 손에 붙들렸다. 그들의 이름은 소피와 한스. 연합군 최후의 공습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남매의 청춘은 짧지만 푸르렀다.

386세대에게는 소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그 이후 세대에게는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로 익숙한 반 나치학생모임 독일 ‘백장미단’의 이야기다.

독재정권 아래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은 시대의 상처를 위무하는 이 책을 몰래 읽고 목젖까지 차오르는 무언가를 억누르며 소리없이 울어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2006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받은 이 명작을 보며 많은 젊은이들은 “저런 때도 있었구나”라며 이제는 그나마 나은 세상에 살고 있다며 안도했다.

2008년 촛불이 광화문을 뒤덮던 나날, 서울 거리의 시민들은 65년 전 뮌헨의 대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늘에서 꽃잎처럼 흩날리는 종이비행기를 받아들었다. YTN노조가 사옥에서 뿌린 ‘공정방송’ 종이비행기였다. 노조 사무실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비행기를 접던 YTN의 그 기자들은 낙하산 사장을 인정할 수 없다며 머리띠를 질끈 고쳐맸다. 그런 그들이 해직이라는 천형을 받게 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그것도 1200일을 넘길 줄은 더더욱 몰랐다.

다 오랜 기억 속의 일이라고, 비극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역사는 뒷걸음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나치나 군사독재정권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민주주의의 후퇴를 목도하고 있다. 아직도 정든 일터 로비에서 ‘지금 복직! 당장 복직!’ 피켓을 들고 19층 보도국에는 내릴 수 없는 엘리베이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YTN 6명의 해직기자들이 이 서글픈 현실을 웅변한다.

마르크스주의자도, 테러리스트도 아니었으며 슈베르트를 음미하는 평범한 젊은이였던 65년 전의 소피와 한스처럼 이들은 어떤 비대한 이데올로기의 명령을 좇은 것이 아니었다. 앞장선 후배들이 다칠까봐 일이 손에 안 잡히는 선배의 사랑이, 조합원을 대표한 위원장의 책임감이, 꿈을 꾸게 해준 회사의 미래를 걱정하는 애사심이 그들을 전선에 서게 했다. 언론인으로서 깐깐한 정의감이 그들을 차마 돌아서지 못하게 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 것도 아니다. 이 여섯 명을 끝내 일터 밖으로 몰아낸다면 이 세상에 남아날 기자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후배들에게 저널리즘이 아니라 눈치를 가르쳐야 한다.  

낙하산 사장이 이번 정권에만 있었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법규나 사규를 어긴 건 잘못 아니냐고 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내 복직의 낭보를 전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했던, 병석에 누운 아내의 찬 손을 잡아줘야 했던, 사랑스러운 아기에게 마이크를 잡은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한으로 점철된 1200일의 고통을 연장할 근거는 절대로 되지 못한다. 최소한의 상식이 우리의 심장에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과 예전처럼 출입처에서 치열하게 경쟁할 때가 됐다. 24번 채널을 돌리면 말쑥한 정장의 그들을 앵커석에서 만날 때가 됐다. 고된 취재와 제작의 무게를 폭탄주 한잔으로 함께 날려버릴 때가 됐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8000명 한국기자협회 기자들의 힘을 모으자. 복직의 꽃, 양심의 꽃 백장미를 피어나게 해야 한다. 이들은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전원 복직의 해맑은 웃음이 꽃잎처럼 퍼질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 모두는 해직기자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