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독 제국'의 역습
[글로벌 리포트│영국] 황보연 한겨레 기자
황보연 한겨레 기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2.02.29 15: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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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보연 한겨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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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현지시간)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의 일요판(The Sun on Sunday)이 전격 창간됐다. 지난해 7월 취재원에 대한 휴대전화 불법 도청 파문으로 ‘뉴스 오브 더 월드’가 폐간된 지 불과 7개월여 만에 후속판이 고개를 내민 셈이다. 이달 초까지도 도청 정보를 받는 대가로 공무원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더 선’ 소속 기자들이 줄줄이 경찰에 체포된 사실을 감안하면 예상치 못한 ‘반격’이다. 일부에선 ‘더 선’도 폐간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마저 돌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새로 창간된 신문은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 이끄는 영국의 타블로이드 언론 권력이 불법 도청파문에도 여전히 건재할 것인지를 가늠해보는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다.
영국에서 ‘더 선’을 비롯한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들은 왕실과 대중 스타, 정치인의 사생활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헤쳐왔다. 이런 선정적인 기사들은 ‘브로드시트’(Broadsheet)로 불리는 ‘정론지’에 견줘 타블로이드 신문의 판매 부수를 압도적으로 늘려준 동시에 권력층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도구가 됐다.
‘뉴스인터내셔널’(‘더 선’ 등이 소속된 머독의 영국 총괄회사) 기자들의 불법 도청이 처음 알려진 것은 2006년이다. ‘뉴스 오브 더 월드’의 왕실 담당 기자 클라이브 굿맨은 사설 탐정을 고용해 윌리엄 왕자의 휴대전화 음성메시지를 도청했다. 그는 왕자가 무릎 부상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특종을 내보냈지만 결국 이런 사실이 밝혀져 경찰에 체포됐다.
정치인과 영화배우, 스포츠맨 등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공인’이라면 그 누구도 불법 도청의 그물망을 피해가기 어려웠다. 불법 도청 사건을 조사 중인 레비슨 위원회가 지난해 한 사설탐정의 기록을 들췄더니 뉴스인터내셔널로부터 도청을 요구받은 인물의 숫자가 2266명이고 잠재적 도청 타깃군도 5795명이나 됐다.
불법 도청에 대한 비난 여론은 지난해 실종된 뒤 살해된 소녀 밀리 다울러의 휴대전화에 대한 도청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한층 고조됐다. 뉴스인터내셔널에 고용된 탐정이 또 다른 음성메시지를 듣기 위해 이전 메시지를 삭제하자 밀리의 부모로 하여금 아이가 살아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 것이다. 이 사건은 168년 역사의 ‘뉴스 오브 더 월드’를 폐간으로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런 ‘공분’이 잠잠해졌다고 본걸까. 새로운 일요판의 창간은 머독의 진두지휘 아래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머독의 첫번째 목표는 잃어버린 독자들을 되찾는 데 있다. ‘뉴스 오브 더 월드’ 폐간 직전 267만명에 이르던 기존 일요판 독자층 가운데 최소 200만명 이상은 되찾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한 부당 1파운드에서 50펜스(약 900원)로 신문값을 내린 것도 이런 의중을 내비친 대목이다.
이와 동시에 머독이 새 매체를 등에 업고 당면한 위기를 정면 돌파하려는 ‘대담한’ 행보에 나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미디어 비평가 로이 그린슬레이드는 ‘가디언’에 쓴 칼럼에서 “새 매체가 ‘의도적으로’ ‘뉴스 오브 더 월드’와의 선 긋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평했다. 대표적으로 덜 선정적인 톱기사와 더 점잖아진 페이지3의 ‘토플리스’(Topless) 모델 등이 종전과 차별화됐다. 이를 통해 등돌린 여론을 우호적으로 만들어 더 이상의 수사 확대를 막겠다는 노림수인 셈이다.
그러나 정작 본질적인 문제인 비윤리적 취재 관행에 대한 반성은 그닥 두드러지지 않는다. 대신 창간사에는 불법 도청 파문으로 체포된 기자들에 대해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 그들 개개인은 무고하다”는 주장이 담겼다. 실제로 뉴스인터내셔널 내부에선 ‘체포된’ 동료들이 중대 범죄자로 취급받는 데 불만을 토로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내부 고발자와의 접촉 과정에서 때때로 돈이 오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마저 공공연히 나온다는 것이다. 40여 년간 일상화된 취재 관행이 언제 재개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기존 독자층 일부에선 “한 신문이 그랬다면 다른 신문도 그러지 않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재구독 의사를 밝히기도 한다. 반면에 ‘보이콧’ 움직임은 한층 복합적이다. 여기에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머독 소유 언론사들의 무소불위 권력을 규제해야 한다는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특종 보도에 연연해온 ‘더 선’에 상처를 입은 리버풀에선 벌써 새 매체에 대한 불매운동이 번지고 있다. 이 신문은 1989년 힐스보로 경기장에서 관중석이 무너져 96명이 사망한 사건을 보도하면서 일부 리버풀 팬들이 사망자의 지갑을 훔치고 소변을 봤다는 기사를 ‘진실’(The Truth)이라는 제목을 달고 내보냈지만 이후 ‘거짓 보도’로 밝혀져 공분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