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언론, 죽이는 언론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편집위원회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2.02.29 15:33:20
칼의 운명은 가혹하다. 주인을 잘 만나 사람을 살리면 활검(活劍)이라 불린다. 하지만 그 반대는 살검(殺劍)이다. 그때의 칼은 공포의 대상 그 자체다. 칼을 다루는 자에게 ‘도를 갈고닦아야 한다’고 숱하게 강조하는 것도 칼이 갖고 있는 이런 본질 때문이다.
칼보다 더 강하다는 펜(Pen), 더구나 그것이 기사로 등장할 때는 어떨까. 파장은 칼 못지않다. 그래서 기사는 칼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기자들이 수습 때 수개월간 경찰서에 숙식하면서 사소한 사실 하나하나까지 철저히 챙기는 고된 훈련을 받는 것도 ‘작은’ 기사가 살검(殺劍)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용석 사건’은 칼이 잘못 쓰인 전형적인 예다. 이번 사건을 강 의원 주연, 의사들 찬조출연, 일부 언론의 협찬에 국한된 촌극으로 치부하기에는 ‘당한 자’들의 상처가 너무 크다.
병역특혜 의혹에 휘말린 박원순 시장의 아들 주신씨가 공개된 자리에서 자기공명영상(MRI) 장비 앞에 서고, 자신의 일상 모습이 담긴 동영상은 물론 여자친구의 신상까지 인터넷상에서 퍼져나갔을 때 느꼈을 심정은 비통 그 자체였을 듯싶다. 오죽하면 박 시장이 “아들이 집 밖을 함부로 다니지 못했고,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했을까. 인격 살인도 살인이다.
물론 언론은 처음부터 강 의원의 말을 중계한 것은 아니었다. 강 의원이 누구인가. 아나운서 성희롱 사건 이후 정치적 코너에 몰리자 안철수 등 ‘거물’ 물어뜯기에 집착하며 돈키호테식 언행을 보여왔다. 개그맨 최효종에 대한 고소 등 각종 고소고발을 남발하며 아예 ‘고소고발집착남’을 캐릭터로 굳히는 전략까지 취했다. 케이블TV의 ‘화성인 바이러스’에 자기를 희화화하며 출연했을 때는 미디어 노출증에 걸린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취재원으로서 신뢰는 바닥에 떨어진 현실이었다.
강 의원은 그러나 영리했다. MRI 사진을 물증으로 제시하며 병역특혜 의혹을 물고 늘어졌다. 비로소 언론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일부 언론은 이를 검증 없이 보도하면서 그의 주장은 날개를 달았다. 전문가인 의사들까지 동조하고 나섰을 때는 패배의 연속이던 그에게는 ‘역전의 잭팟’을 눈앞에 둔 듯싶었을 게다. 아끼던 ‘금배지’까지 내걸지 않았는가.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주신씨가 재촬영을 통해 본인의 MRI가 맞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승패는 쉽게 갈렸다. 강 의원은 물론 그의 무모한 도박을 부추긴 일부 언론의 ‘KO’ 패였다. 초동부터 언론이 가장 기본적인 팩트만 확인했어도 논란이 이처럼 커지지는 않았을 터다.
여기까지는 ‘한판 역전승’을 노렸던 강 의원의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치부할 수 있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지고 의원직을 사퇴한다고 했을 때 내심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사퇴 선언 나흘 만에 “남을 저격하려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야 한다”며 4월 총선 출마 의사를 밝혔다. 한 개그 프로그램의 ‘꺾기도’라는 새 코너와 비슷하다. 다만 아무런 웃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 더구나 강 의원에 동조하면서 대놓고 칼을 휘두른 언론이 자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제2, 제3의 강용석을 키울 뿐이다. 살(殺)의 언론으로 그저 남아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