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사람들의 품으로

연합뉴스 차지연 기자·프레시안 허환주 기자

기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소외된 이웃, 사회적 약자의 벗이 되겠다는 꿈을 꾼다.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 생생한 숨결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희망을 갖는다. 꿈과 희망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는 기자들이 많다. 두 젊은 기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 연합뉴스 차지연 기자  
 
쪽방 주민과 함께한 30일…연합뉴스 차지연 기자

꽁꽁 얼어붙은 수도꼭지, 실내온도 영하 2도, 정부 최저주거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5.5㎡의 방. 지난겨울 차지연 연합뉴스 기자는 이곳 서울 용산구 동자동 5층 옥탑 504호에서 새해를 맞았다. 한 건물에 여성은 자신 단 한명 밖에 없는 쪽방촌에서 이 2년차 막내 기자는 한 달을 40여 만원의 생활비로 이어가며 주민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14회에 걸친 기획시리즈 ‘2012 겨울, 쪽방’은 태어났다.

언론사에 입사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지난 12월, 차 기자는 ‘하늘같은’ 캡의 말을 들었다. “쪽방 주민의 삶을 제대로 쓰려면 직접 살아봐야 한다.” 사건팀 동료들의 시선은 일제히 차 기자에게 모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쪽방촌 기사를 몇 차례 썼던 유일한 기자였다. 다들 반 농담으로 받아들였던 제안이 그에게는 날카롭게 꽂혔다. 지탱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건물 아닌 건물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모습들이 눈에 선했다. “통신사가 이런 기획보도를 할 수 있을까.” “여기자가 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사흘 만에 집을 구한 차 기자는 동자동 주민이 되어 살을 깎는 추위와 싸웠다.

더 무서운 것은 무기력과 사람이었다. 추위와 가난은 인간을 고립시켰다. 사람들은 고독한 섬처럼 마음의 항구를 열지 않았다. “저 자신도 무기력증에 빠진 초반 10일이 가장 힘들었어요. 배고프고 추운 것에 비할 게 아니었죠.”

굳게 닫혔던 주민들의 방문이 자연스럽게 열릴 무렵, 한 달은 훌쩍 지나갔다. 기사를 쓰기 시작하면서는 더 큰 부담감이 찾아왔다. 고된 사건팀 기자의 일상을 모두 소화하며 밤새워 노트북을 두드렸던 그의 열정은 한국기자협회의 ‘이달의 기자상’ 수상만을 남기지 않았다. 아직 짧은 기자 생활이지만 가장 자랑스러운 기사를 썼다는 뿌듯함이었다.

쪽방촌의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이상한 4월, 차 기자는 다시 추운 거리에 서 있다. 연합뉴스가 23년 만의 파업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의 ‘연합 찌라시’ 이야기는 많은 선배들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의 30일을 통째로 바친 쪽방촌 기사에 달려 있던 댓글 하나. “연합 찌라시 기자가 한달 동안 살며 기사를 썼을 리 없다”는 말이었다. “쪽방촌 취재 때 연합뉴스에 대한 시선에서 부끄러움도 느꼈어요. 하지만 파업 뒤 연합뉴스에 다닌다는 게 자랑스러워졌어요. 이렇게 믿을 만한 선배가 많았다는 걸 알았거든요.”

차 기자는 파업이 끝나면 소외 계층에 대한 기사를 더 쓰고 싶은 욕심이다. 왜냐면 그의 말대로 “기자란 사람들이 외면하지만 알아야 하는 것을 써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장우성 기자>





   
 
  ▲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  
 
조선소 하청업체 취업…프레시안 허환주 기자

“환풍은 제대로 되지 않아 미세한 먼지와 철가루 등이 공중에 떠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드릴, 철사 등 각종 장비와 자재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사방이 꽉 막혀 있어 전등을 켜지 않으면 대낮임에도 깜깜했다. 지옥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조선소 안의 작업현장을 보고 든 첫 생각이었다.”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는 지난달 경남 창원에 있는 한 조선소 하청업체에 취업했다. 산업재해 사건은 하청노동자, 비정규직에게서 주로 발생했다는 점에 착안해 직접 체험하고 기사를 써보자는 취지였다.

대학 시절, 공사판에서 험한 일 좀 해봤다고 자신했지만 허 기자는 며칠 만에 몸살이 걸렸다. 전태일이 살아 돌아 왔으면 혀를 끌끌 찼을 정도의 작업환경이었다.

허 기자가 일한 곳은 배의 엔진룸인 캐이싱(Casing). 배 엔진 시설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강철판으로 내부는 대부분 파이프로 채워져 매우 비좁고 밀폐돼 있다. 그는 전등 불 하나에만 의지한 채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파이프에 함석판을 씌우는 일을 했다.

1.5m 높이의 족장(발판) 위에서 일을 할 때는 늘 허리를 구부리고 일해야 했다. 작업장 내에서 늘 써야 하는 안전모까지 쓰면 키가 180cm가 훌쩍 넘었다. 허리와 등, 무릎 등이 쑤셔왔다.

작업은 위험했다. 여러 층이 겹쳐 있는 족장 위에서 일하다 보면 머리 위로 용접 불똥이 쏟아졌다. 망치나 드릴도 떨어졌다. 안전모를 쓴 머리로 ‘쿵’하고 묵직한 게 떨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빈 페인트 통이었다.

현장은 아찔함만으로 그치진 않는다. 지난 2월에는 누군가 족장을 연결해놓은 철사를 풀어 40대 여성이 6m 아래로 떨어져 반신불수가 됐다. 허 기자가 일하던 당시에도 5층 높이에서 한 여성이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다행히 바다로 떨어져 목숨은 건졌으나 무신경한 주위 반응에 한 번 더 놀랐다. “주의해라. 신경 써라.” 그게 전부였다. 자체 조사도 없었다. 일은 계속됐다.

4회의 연재기와 4회의 분석 기획기사를 쓰고 있는 허 기자. 그는 “조선소에서 사망·사고 사건이 발생하면 그 피해자는 대부분 하청 노동자”라며 “언론에 공개되지 않는 군소 조선소까지 합하면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조선소에서 죽어 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조선소 하청업체 문제를 지속적으로 보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원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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