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폭력 단죄에는 시효 없다
[글로벌 리포트│중국] 손관수 KBS 상하이 특파원
손관수 KBS 상하이 특파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2.04.04 15: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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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관수 KBS 상하이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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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8일 타이베이의 평화 공원. ‘2·28 사건’ 65주년 정부 기념식에서 국민당 마잉지우 총통은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한 것만으로 결코 국가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지 않는다”며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과했다.
65년 전인 1947년 2월 28일. 북부의 타이베이와 남부의 까오시옹을 포함한 대만 전역은 국민당 군정에 항의하는 시위로 폭발했다. 해방군으로 환영했던 국민당군이 오히려 점령군 행세를 하는 것에 쌓여가던 불만은 한 사건을 계기로 항쟁으로 비화됐다.
2월 27일 저녁, 타이베이 용러시장에서 밀수담배를 팔던 한 노파를 단속 반원들이 심하게 구타하는 데 항의하던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쏴 한 시민이 사망한 것이다. 다음날 이 소식이 퍼지면서 대만인들이 불같이 들고 일어났지만 국민당 군부는 강압 진압에 나섰고 결국 대륙에서 급파된 국민당군 정예 21사단이 투입되면서 대만 전역은 처참한 살육장으로 변했다. 3만명이 넘는 대만인들이 희생됐다.
40년의 계엄통치 기간에 말 한마디 꺼낼 수 없는 ‘통곡의 역사’였던 ‘2·28’사건은 87년 민주화 조치 이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진상규명 요구와 대만 출신의 국민당 리덩휘 총통의 취임으로 극적인 반전을 맞아 정부의 사과, 국가의 사과, 기념관 건립, 기념일 제정 등으로 이어졌다.
취재 중 만난 많은 대만 사람들은 한국의 5·18 사법처리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한국은 정말 대단하다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듣는 이의 마음은 오히려 착잡하고 부끄러웠다. 5·18 쿠데타에 대한 역사적인 단죄의 정신은 흔들리고 거꾸로 국가 폭력으로 인한 민주주의와 개인의 삶이 파탄나는 현실이 지금 우리 앞에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KBS 정연주 사장은 해임이 무효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받았다. 그가 회사에 수천억원의 해를 끼쳤다는 배임혐의도 최종적으로 무죄로 판명난 터다.
그러나 그는 ‘해임되지 않았더라도 이미 임기가 종료되었으므로 복귀할 수는 없다’는 법리 앞에 또 한번 좌절해야만 했다. 방송장악에 눈이 먼 국가폭력이 개인의 삶은 물론 공영방송까지 파탄낸 것이다. ‘장물’ 논란이 일고 있는 정수장학회 문제도 마찬가지다. 법원은 ‘강제로 헌납한 것은 인정되나 피해배상 소멸시효가 지났다’며 피해자의 억울함과 역사적 정의는 외면했다.
국가란 무엇이고 법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안정성을 이유로 한 법리는 일면 수긍할 수 있다치더라도 ‘폭력을 독점한 국가의 인권 유린행위는 어떻게 단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인류사상 최대의 전쟁이었던 2차대전은 ‘국제법은 전쟁 등 반인도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시효를 따지지 않는다’는 세계인의 집단 지성, 불문율을 낳았다. 인간의 사악함, 파시즘과 나치즘,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이었다.
최근 불거진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은 청와대와 총리실, 검찰까지 손발을 맞춘듯한 파시즘의 음험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는 국가라는 ‘괴물’을 제대로 통제하지 않을 경우 국민의 인권이 어떻게 파탄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국가 폭력, 인권 유린 행위를 무슨 ‘시효’를 이유로 지나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가 설 땅이 있겠는가.
“이 비참한 사건은 국가가 인권을 유린한 국가 폭력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의 교훈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돼서는 안됩니다!”
대만 2·28 국가기념관장의 결연한 인터뷰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