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에 선 13인, 너를 부르마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편집위원회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2.04.11 14:11:37
강지웅, 권석재, 노종면, 우장균, 이근행, 이용마, 이호진, 정대균, 정영하, 정유신, 조상운, 조승호 현덕수. 그 이름을 부른다.
우리가 무참히 빼앗긴 사랑하는 동료들을 외쳐본다. 세끼 밥을 넘길 때마다 목젖에 걸리는 가시처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그들을 그리워한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에 젖어드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그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울먹여서는 안된다. 슬퍼하면 안된다. 누구보다 밝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13인의 이름을 가슴 속에 아로새길 것이다. 꼭 돌아올 것을 알기에, 특종의 바이라인에서 그 이름 석자를 시샘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확신을 갖기에 그렇다. 정의는 수많은 작은 전투에서 패배할지라도 끝판의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역사의 가르침을 알기에 그렇다.
지난 5일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앞에는 이 정겨운 얼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언론자유가 만개한 시절이라면 취재와 제작을 위해 만났을 텐데 우리는 마이크를 움켜쥐고 울분을 토하는 그들을 대해야 했다. 그래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한국 언론의 미래를 걱정하고 동료들의 파업 투쟁을 지지하는 그들의 대범함에 머리 숙여야 했다.
이것이 무슨 비극인가. 거짓말 같은 시간이란 말인가. 이들이 왜 징벌의 제단에 바쳐져야 하는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과 딸 아이가 새 학기를 맞아 가져온 가정통신문에 아빠의 직업을 뭐라고 써야 할지 이들은 잠시 주저해야 한다. 친구들과 아빠 자랑에 수다를 떠는 아이들이 혹시 움츠러들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해야 한다. 어깨를 두드려주는 아내의 손길이 왠지 묵직하게 다가온다. 말없이 웃어주시는 부모님의 움푹 파인 주름살에 부지불식간에 코끝이 찡해진다. 기사를 본 옛 친구들에게 걸려온 걱정 섞인 전화를 끊는 손가락이 가냘프게 떨려온다.
더 슬픈 것은 해고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사람들이다. ‘사내 질서 확립’ ‘엄정 대처’ ‘원칙 고수’ ‘응분의 조처’ 등 피한방울 흐르지 않는 싸늘한 언어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이들이다. 더욱이 과거엔 언론계 선배로서 뒷이야기와 무용담을 자랑스레 풀어놓던 그들이기에 더 참담하다. ‘기자란 이래야 한다’ ‘언론인이란 이런 것이다’라며 청년 언론인들을 가르치던 그들이기에 더 기가 막히다.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가족이자 후배이고 자기들에게 거추장스러울 때는 ‘사규를 위반한 직원’으로 둔갑하는 저급한 언어의 유희에 우리의 펜은 흔들린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해서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가. 후배들에게 밀리지 않겠다는 자존심인가, 이념에 대한 확신인가, 아니면 그 누구에 대한 충성심인가. 우리는 독이 오른 군사정권의 총칼에도 굴복하지 않고 제자들을 지킨 고 김준엽 선생의 기개를 기억한다. 자본의 언론통제에 저항하며 사표를 던진 김중배 선생의 정신을 배웠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엔 늦었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더 이상 해고의 고통을 퍼뜨리지 말라. 자신의 손으로 피 흘리게 한 후배들을 제자리에 되돌려놓아라.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신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