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수 가족 행방 좇으며 이륙 20분전 항공권 구입

[취재이야기 공모 우수상]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중국 베이징의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판사처에 한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한 탈북자 장길수군 가족 7명이 필리핀을 경유, 2001년 6월30일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 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우수상]탈북 소년화가 장길수 가족 서울행 동승기

“기자님,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결정할 입장이 못됩니다. 매니저님께 보고 드리죠.”
지난 2001년 6월30일 오후 1시20분 마닐라발 서울행 아시아나 여객기 내. “비행기 연결 관계로 출발이 지연되고 있다”는 기내 방송을 들으며 여객기 이코노믹석의 간이 스낵실 커튼을 열어젖혔다. 음료수를 준비 중이던 한 여승무원은 내가 신분을 밝힌 뒤 비즈니스석을 가리키며 “1분만이라도 만날 수 있나”라며 넘겨 짚자 ‘놀란 토끼’같은 대답으로 탈북자 7인의 탑승 사실을 간접 확인해줬다. 마치 길수 가족 탑승 사실을 확인한 듯 유도 심문한 것이 주효했다.

그 사이 비행기는 활주로 진입을 위해 서서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다급한 심정에 화장실에 들어가 휴대전화로 이영님 부장(외신1부장)에게 “길수 가족 탑승” 한 마디를 던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분만 사실 확인이 늦었더라도-특종도 좋지만-승객 안전을 위해 기내에서 휴대폰을 쓸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부장은 ‘(마닐라발 서울행 아시아나 여객기=연합뉴스) 홍덕화 특파원=’을 바이라인으로 ‘길수 가족이 탑승한 것으로 같은 여객기에 동승한 연합뉴스 기자에 의해 확인됐다’고 긴급 타전, 내외신 기자들의 ‘길수 정보’ 갈증을 해소시켰다.

길수군 가족 비행기에 잠입 성공
사실 천신만고 끝에 이륙 시간 20분 전에야 항공권을 구입해 탑승구까지 한숨에 줄달음질, 기적처럼 탑승하긴 했으나 ‘7인방’의 행방이 묘연해 가슴이 몹시 답답했다. “아시아나 발표대로 정말 ‘예약 취소’된 것일까?”, “길수 네는 다른 비행기로 가고 ‘나홀로’ 한국행?” 등의 불안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세계적인 뉴스를 좇아 베이징, 홍콩 등지에서 마닐라로 온 내외신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 이들은 관계당국의 통제를 받던 아시아나항공의 ‘길수 가족 예약 취소’ 성명 발표와 이를 그대로 보도한 AP통신 기사로 갈팡질팡하는 모습이었다. 한국 기자들이야 보도진을 따돌리려는 ‘연막 작전’임을 알아차렸지만 교도통신 등 외신기자들은 20분 먼저 출발하는 대한항공(12:40)과 필리핀 항공(14:15) 티켓 확보 경쟁에 나섰다. 한 외국 통신사 기자는 아시아나 티켓 매입이 불가능해 보이자 인천공항에 먼저 도착해 ‘한 건’ 올려보자는 심산으로 KAL에 탑승했으나 당국의 강력한 통제로 비행기값만 날렸다는 후문.

기자로서 유일하게 길수 가족과 동행하며 ‘잠입 취재’까지 성공하게 된 것은 비행기 출발 20여 분 전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붙어보자”며 이를 갈았던 오기 덕분이었다. 전날 밤 자정쯤 마닐라공항에 도착해 AP 홍콩지사의 친구에게 소개 받은 필리핀 사진기자로부터 길수 가족이 공항 내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어 대한항공 관계자들을 찾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길수 가족의 현 위치 정보를 얻어 ‘라운지 밤샘’ 기사로 엮었다. 기사 출고 후 새벽 4시쯤 마닐라 시내의 만다린 호텔로 들어가 잠시 눈을 붙인 뒤 석간용으로 ‘길수 가족 공항 정비실로 이동’ 제하의 스케치 기사를 보냈다.

이런 ‘활약’을 눈여겨본 대사관 측이 KAL관계자들에게 “연통(연합통신)에 생중계”한 행위를 심하게 질책한 것은 30일 여객기 동승취재 작전의 험난을 예고한 복선이었다.



   
 
  ▲ 마닐라발 인천행 아시아나 항공기 내에서 장길수 군(사진 중앙 체크무늬 상의 착용) 가족 7명이 함께 포즈를 취했다. (연합뉴스)  
 
호텔로 돌아가기 전 야간 데스크였던 김○○ 차장에게 회사 차원의 항공기 예약을 요청했다. 대사관과 관계당국의 항공권 취득 방해를 우려해서였다. 오전 8시쯤 이 부장이 전화로 예약번호를 알려져 한순간 쾌재를 불렀으나 이런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 시간여 지난 뒤 서울에서 날아온 ‘예약 취소’ 소식이 귓전을 두드렸다.

즉각 공항 내 아시아나항공 사무실로 찾아가 ‘예약 번호’를 근거로 항의와 애원을 번갈아 해봤지만 허사였다. 라이벌 항공사 관계자를 만나 얻어낸 ‘한 시간여 만의 예약 취소는 이례적인 일’이라는 ‘유권 해석’을 근거로 거세게 항의하자 현지 직원들은 티케팅에 협조하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무전을 통해 내 이름을 확인한 ‘한국인 매니저’는 ‘노(No)’라며 보이콧 지시를 내렸다.

이제 남은 방법은 사업가 행세를 하며 비슷한 이름을 탑승 대기자 명단에 올리는 일이었다. 그때 시간이 이륙 2시간 전인 오전 11시. 체크인 창구로 찾아가자 현지 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오버 부킹으로 표를 팔 수 없다”는 소리만 되풀이했으며 다른 질문에 거의 대꾸도 하지 않아 화를 북돋았다. 싸우는 소리를 듣고 나타난 한국인 매니저는 “20여 명이나 초과 예약, 표를 팔 수 없다”고 말했다. 나도 질세라 “매주 해외 출장을 다녀온 경험에서 볼 때 전체 좌석 중 10%도 안되는 초과 예약률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손해를 봐도 내가 보면 되니 팔아라”며 설득과 재촉을 번갈아 했으나 허사였다.

“나가 와 KAL을 탄다요?” 사투리 작전 주효
잠시 후 카운터로 돌아온 이 매니저는 “바이어 상담 문제로 오늘 꼭 들어가야 한다”는 내 말에 “KAL 티켓을 사주겠다. 어쨌든 서울만 가면 되지 않느냐”며 절묘한 역제의로 나를 당황시켰다. 순간 흔들렸던 나는 정신을 가다듬은 뒤 여권에 끼워둔 아시아나 마일리지 카드를 꺼내 보이며 “나가 뭐 땀시(내가 왜) KAL을 탄다요?”라며 애향심(愛鄕心) 냄새 풍기는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그러자 이 매니저는 ‘필리핀 항공 티켓’ 신공(神功)으로 응수했다. 공중을 날아다니며 상당한 내공을 축적한 듯한 이 매니저의 상대가 못된다고 판단해 일단 자리를 피했다.

공항 4층의 KAL 사무실로 돌아와 작전 구상을 펴던 중 ‘비행기도 못 탈 바에야 기사라도 하나 써놓자’라는 생각에 ‘내외신 기자들이 공항에 우글거리고 있다’ 등 ‘길수 가족 마닐라 체류 이모저모’를 출고했다. 시간은 낮 12시20분. 이륙 40분 전이 되니 공연히 부아가 치밀어 다시 아시아나항공사 카운터로 찾아갔다. 12시30분. 이번엔 ‘예약 번호’를 들고 “소비자 권리 침해 혐의로 고발하겠다(sue)”고 윽박지르며 티켓 판매를 재요청했다. 현지 직원들은 “노(No)” 일색이었다.

한국인 매니저를 다시 찾아가 ‘고발 위협’ 카드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심호흡을 하던 중 남성 4명이 카운터 여직원에게 거세게 항의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항공사가 (기자일 확률이 높은) 남성승객들의 예약을 대거 취소함에 따라 서울로 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규합해 매니저를 찾아가 마지막 기싸움을 벌였다. “소비자 권리 침해에 대한 법정 고발은 물론 언론사들에도 알릴 것이며 바이어 상담 실패로 인한 민사책임도 불사해야 할 것”이라는 초강수 협박에 매니저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던 매니저는 “탑승 여부는 손님 책임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Sell this gentleman a ticket” 지시를 내렸다. 12시38분이었다.



   
 
  ▲ 대만중앙통신사는 지난 2003년 연말 창립 80주년 기념으로 세계 10대 통신사를 소개하면서 연합뉴스의 대표적인 특종기사로 ‘소년화가 장길수 군 가족 동승기’를 소개했다. (연합뉴스)  
 
마닐라 초행길에 20여 분을 남겨 놓고 탑승구까지 간다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에, 매니저에게 손짓으로 허가를 구한 뒤 현지 여직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애절한 눈빛과 함께 “(패스를 가진) 당신 도움이 절실하다”라고 호소하면서….

좌우에 카메라 가방과 노트북컴퓨터 가방을 나눠 매고 트렁크를 끌며 젖먹던 힘까지 다해 뛰었다. 출국 심사대에서 ‘새치기’를 묵인해준 승객들의 이해와 여직원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5분 전 16번 게이트에 안착했다. 마침 ‘VIP’ 때문인지 탑승이 지연, 승객 대부분이 게이트 앞에 몰려 있었다. 숨을 고를 여유도 없이 서울에 탑승 사실을 전하며 길수 가족을 찾아 나섰으나 보이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다 되도록 주인공들이 나타나지 않아 탑승 여부를 놓고 현지 항공사 관계자들을 상대로 탐문 조사를 해봐도 모두 ‘모른다’로 일관할 뿐이었다. 오후 1시 항공사 관계자들의 재촉으로 맨 마지막으로 탑승하면서 살펴본 ‘비즈니스석’은 상당수가 비어 있었다. ‘최후 탑승객’들을 위해 예비된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국가기간통신사에서 왔습니다”
260석 중 맨 마지막 좌석에 앉은 기자는 비즈니스석 바로 앞에 앉은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해 자리를 옮긴 뒤 수차례 비즈니스석 ‘잠입’을 노렸다. 작전을 개시하는 ‘H-아워’는 이륙 1시간30분 후로 잡아뒀다. 전날 밤 2명으로 추정되는 수행 요원들이 공항 라운지에서 꼬박 밤을 샌 만큼 기내식을 먹은 뒤 잠에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비즈니스석의 1차 잠입은 승무원에게 호소한 ‘설사’ 작전이 주효했다. 우측 출입구로 들어가며 세로 3열, 18석(3×6)인 비즈니스석의 좌석 상황을 살폈다. 조종석 뒤에 있는 화장실에서 나와 까치발로 비즈니스석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 좌우 출입문 쪽 의자에 앉은 수행 요원 두 명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본격적인 작전 돌입 후 돌발상황이 생기면 사진 촬영이어려울 것에 대비해 먼저 6㎜ 비디오 카메라로 ‘몰래 촬영’을 한 뒤 카메라를 품속에 숨기고 비즈니스석으로 다시 들어섰다.

우측 맨 뒤 의자에 앉아 있던 길수(17)군의 이종사촌 누이 이화영(17)양은 난데없이 나타난 정장 차림의 남자와 마주치자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비쩍 마른 내 얼굴을 보고-북한 공작원이 비행기 안까지 쫓아온 것으로 착각해-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생각에 얼른 시선을 화영양 앞자리로 돌렸다. 상기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길수군의 외할아버지(정태준·69)와 외할머니(김춘옥·68) 부부에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국민 모두 여러분의 도착을 고대하고 있습니다”라며 환영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두 사람 역시 의외 인물의 출현에 놀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적극적 성격에 달변가’로 알려진 외할머니마저 “어데서 오셨습네까”라고 물으며 잠에 빠져 있는 수행 요원들의 좌석으로 수차례 눈을 돌렸다. 중국으로 탈북한 뒤 4년 반이나 도망자 생활을 했던 그들이기에 낯선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신분을 밝혀야 하지만 거짓말은 하기 싫어 “대한민국 국가기간통신사에서 나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통신사가 언론사인 줄 몰랐으면…’하고 생각했다.

외할머니는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느냐”라며 손을 잡고 위로 인사를 건네자 경계를 풀은 듯 “이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겠습니까”라며 ‘한국행 소감’에 대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제서야 외할아버지도 빙그레 눈웃음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후에 ‘연합뉴스 홍콩특파원’으로 된 명함을 받아들은 뒤부터는 “이제 그만합시다. 서울 가서 다 얘기할 텐데….”라며 대답을 꺼렸다.

10여 초 더 취재하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수행원들이라도 깨면 낭패라는 생각에 이코노믹석으로 일단 후퇴했다. 3~4분 후 2차 진입 후에도 수행원들의 꿈나라 여행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고 옆자리 승객 강 모씨를 사진기자로 위촉, ‘투캅스’ 체제로 취재인력을 보강했다. 한정된 시간 내 잠입취재를 완료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우선 중간열 맨 뒤쪽의 길수군 자리로 갔으나 헤드폰을 낀 채 잠들어 있었다. 주인공 길수군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봐도 반응이 없다. 송창식의 노래처럼 “시간(수행원이 깰 시간)은 자꾸 가는데, 집(인천공항)에는 다 와가는데”도 감은 눈을 뜨지 않고 있는 그를 흔들어 깨워볼까, 생각해봤으나 다른 작전으로 바꿨다. 자칫 성이라도 내면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판단에 ‘정숙보행’으로 좌측 창가로 가 길수군 외종사촌 민철(15)군과 이모 정선희(44)씨에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조부모가 이미 ‘낯선 남자와의 대화’ 테이프 커팅을 한 뒤라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무척 기쁘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이게 전부였다. 이것저것을 물어봐도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2차 후퇴.

길수군 “미술말고도 하고 싶은 게 있어요”
10여 분 후 3차 잠입 때도 수행원들과 길수군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달변가인 외할머니 좌석을 다시 찾았다.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려 거울을 보며 분화장을 하던 외할머니는 다시 찾아온 ‘기자 선생’이 친숙해진 듯 사진 촬영도 응하고 많은 얘기도 들려줬다. 반면 남편은 “그만 가서 얘기합시다래”라며 굵직한 음성으로 질책하시는 게 아닌가. 야속도 하셔라, 생각하면서 왠지 뒷머리가 간지러워 나도 몰래 뒤를 돌아봤더니 두 수행원 한 명이 어이 없다는 듯 웃는 모습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곧바로 그에게 다가가 ‘무단 침입’을 정중히 사과한 뒤 “기자로선 유일하게 동승 취재하는 만큼 역사의 증언자로 기록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재차 요청했다. 카메라를 멘 내 모습을 보고 이미 상황이 끝났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여객기에 기자가) 탄 줄 몰랐다”는 말과 함께 “대신 ‘김정일 관련 언급’ 등 민감한 내용은 절대 기사화하지 말아달라”며 사실상 취재를 용인했다. 이후 비즈니스석은 언제든 들락날락 가능한 연합뉴스의 ‘안방’이었다. 수행원의 ‘취재 허용’ 발언 이후 할말이 없다던 길수네 가족들의 대답은 한층 구체적이었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던 길수군이 눈을 비비며 일어난 것도 그때였다.

‘미술 공부’ 내력이나 장래 희망, 서울에서 하고픈 일 등 온갖 질문에도 “서울 가서 얘기합시다”며 한동안 묵묵부답이었던 길수군은 “20분 후 인천공항에 도착한다”는 조종사의 기내 방송이 나온 뒤에야 “미술 말고도 하고 싶은 게 있다”며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길수군을 비롯한 가족 7명의 굳게 얼어붙었던 마음은 오후 6시13분 여객기가 꿈에 그리던 한국 땅에 착륙, 미끄러지기 시작하면서야 눈 녹듯 풀린 듯했다. 자유의 땅에 드디어 안착한 것을 실감한 듯 몹시 흥분한 모습이었으며 그때서야 가족 전체의 사진 촬영에도 응했다.

반면 ‘눈물로 그린 무지개’의 주인공인 길수군은 옆자리에 앉은 내게 29개월여 동안의 우여곡절을 담담히 털어 놓으면서도 그동안 겪은 일들을 미처 말로 옮기기 어려운 듯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모든 게 꿈만 같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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