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수난시대
[글로벌 리포트│영국] 황보연 한겨레 기자
황보연 한겨레 기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2.05.23 15: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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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보연 한겨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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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BBC 사장은 ‘토리’(보수당)여야 한다.”
지난 14일 보리스 존슨 런던 시장이 영국 공영방송 BBC에 느닷없이 ‘일격’을 가했다.
보수당 소속 존슨 시장은 이달 초 치러진 영국 지방선거에서 노동당의 켄 리빙스턴 후보를 누르고 재선된 바 있다.
이번 선거에서 참패한 보수당의 체면을 유지해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유력한 차기 당권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는 인물이다.
존슨 시장의 ‘일격’은 그가 기자시절 몸담았던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직접 쓴 칼럼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BBC가 국가 통제주의적이고 반기업적이며 극도로 좌파적 시각에 편중돼 있다”며 “차기 사장은 친기업적이어야 하고 (보수당의) 긴축 정책 등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토리’가 필요하다, (할 일을 놔두고) 다른 데 기웃거리지 마라, 우리가 BBC를 바꾸지 못하면 이 나라를 바꿀 수 없다”고 못박았다.
BBC 사장을 집권당의 정치색에 맞게 바꾸자는 이 ‘대담한’ 주장은 나름 구체적인 제안으로까지 이어졌다.
현재 마크 톰슨 BBC 사장은 런던 올림픽을 치르고 난 뒤 올가을에 사임할 뜻을 밝힌 상태다.
이런 가운데 존슨 시장은 “(연립정부의 한 축인) 자유민주당이 정부가 BBC 사장을 이런 사람으로 임명하도록 하는 데 따라줘야 한다”며 이른 시일 내에 톰슨 사장의 후임자를 물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주장을 펴면서 그는 몇 가지 근거를 내밀었다.
우선 런던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첨탑 형태의 구조물인 ‘아르셀로미탈 궤도’(ArcelorMittal Orbit)에 대해 BBC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비판한 게 빌미가 됐다. 민간 기업의 후원으로 지어진 구조물을 공짜로 이용하자고 하는 것은 ‘반시장적’이라는 논리다.
게다가 존슨 시장은 루퍼트 머독 소유 언론사의 휴대전화 불법도청 파문에 대해 BBC가 ‘과잉보도’를 하고 있다는 불만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미 그는 이번 선거 기간에 BBC 기자에게서 이 회사와의 연루설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답변 대신 욕설을 퍼붓는 ‘용맹함’을 보인 바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칼럼에서 “(이번 선거에서) 주된 정적은 ‘BBC 뉴스’였다”는 주장까지 폈다.
존슨 시장의 ‘대담한’ 행보는 즉각 비난 여론에 휩싸였다. BBC 대변인은 “BBC 뉴스는 어느 한 쪽의 시각에 기울어지지 않은 ‘불편부당성’을 견지해왔다”며 “정치인과 기업 등에 던지는 질문이 때때로 (그들에게) 불편할 수 있겠지만 시청자들은 그런 권력층에 도전할 것을 기대한다”고 반박했다.
노동당의 해리엇 하먼 의원(예비내각 문화부 장관)도 “공정한 보도로 신뢰받고 있는 BBC 사장 선임의 조건은 오로지 그들이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며 “보리스 존슨 시장은 그가 BBC에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당장 그런 생각을 거둬 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난을 넘어 코웃음을 치는 이들도 적잖다. 무엇보다 그 배경에는 BBC가 영국 사회에서 ‘공정보도’로 신뢰받는 언론이라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BBC도 공영방송을 좌지우지하려는 정치권의 입김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만은 할 수 없다.
BBC 사장을 선출하는 기구인 ‘BBC 트러스트’의 수장은 사실상 정부에서 임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크리스 패튼 회장도 집권당인 보수당 대표를 지낸 전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대목은 이들이 BBC 보도 및 제작 방향을 좌지우지하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데 있다.
칼럼니스트 피터 프레스턴은 20일 ‘옵저버’에 쓴 칼럼에서 “BBC의 대다수 직원들이 그들의 ‘명성’을 스스로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조직 수장이 임명되는 과정보다는 조직 시스템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독립성을 확보하려는 구성원들의 노력이 전통으로 굳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맥락이다.
그럼에도 BBC의 정치적 독립에 대한 경계를 늦춰선 안된다는 지적도 동시에 나온다.
존슨 시장이 차기 총리직에 도전하려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BBC를 장악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때마침 국내에서는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 등을 요구하는 공영방송 노조들의 파업이 장기전으로 치닫고 있다.
KBS 사장 스스로 공정성과 신뢰도를 높이겠다며 도입한 ‘KBS뉴스 옴부즈맨’의 교수 6명이 최근 ‘소통 불가’를 이유로 전원 사퇴한 일은 국내 공영방송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냈다.
현재 KBS 구조로는 공정성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이들의 진단은 앞으로 갈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보여줬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힘겹게 지켜내야 할 과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