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전사자 송환 숨은 노력…연합 문관현 기자


   
 
  ▲ 연합뉴스 문관현 기자  
 
지난달 25일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국군 유해 12구가 국내 송환됐다. 정확하게는 1950년 미군과 함께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카투사 장병들의 유해였다. 이들의 유해가 고국의 품에 안기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물심양면으로 노력한 한 기자가 있었다. 연합뉴스의 문관현 기자다.

현재 하버드대 웨더헤드 국제관계센터(WCFIA)에서 연수 중인 문관현 기자는 국방대학교에서 한국전 당시 카투사 실태에 대한 석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유해 발굴 문제에 관심을 갖게됐다.

카투사로 군복무를 해 ‘대한민국카투사전우회’ 사무총장을 지냈던 문 기자는 한국전 당시 카투사들이 미군과 2인1조를 이루는 ‘버디 시스템’을 통해 전장에 투입됐다는 사실을 논문 준비 과정에서 알게됐다.

북한 땅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는 1993년부터 북미협상을 통해 북한 내 발굴 작업에 착수, 226구가 미 본토에 돌아왔다. 그러나 카투사 유해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었다. 여기서 그의 문제의식이 싹텄다.

문 기자는 2008년 6.25를 기해 생존한 한국전 참전 카투사인 이정환씨에게 미 백악관 앞에서 성명을 발표하도록 권유해 실현시켰다. 미국 정부가 카투사 유해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관련 자료를 공개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같은 해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는 이 문제가 비공식 의제로 다뤄졌다. 이어 방한한 미 국방부 관계자들이 문 기자를 만나 카투사 유해 문제에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연수를 위해 미국을 찾은 뒤에도 분주했다. 한국군 참전용사 전우회(KWVA) 보스턴 지역 회원에 가입해 참전했던 예비역 미군들을 “당신들과 생사를 같이한 카투사들의 유해를 찾는 것은 동맹국 전우로서 도리”라고 설득했다. 결국 전우회는 미 정치권에 카투사 유해 확인에 나서줄 것을 요청하는 공식 서한을 전달했다. 1988년 미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가 하버드대를 방문했을 때 만나 카투사 유해 확인에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부탁했다. 주한미군 근무 경험이 있는 듀카키스는 그 자리에서 “엄청난 분노와 부끄러움을 느낀다”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WCFIA 차원에서 UN본부를 방문했을 당시도 카투사 유해 문제 등 정전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다.

결국 양국 정부가 움직여 올해 12구의 국군 유해가 62년 만에 조국의 품에 안기게 됐다. 2004년 북한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지에서 찾아낸 226구의 미군 유해가 미국에 송환될 때 포함돼 하와이에 머물던 12구의 미확인 아시아계 유해에서 이갑수 일병, 김용수 일병 2명이 확인돼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문 기자는 여론이 조성되자 뒤늦게 우리 정부가 유해 송환에 나선 점을 꼬집었다. 국방부를 출입할 때도 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정부는 의지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북한에 묻혀있는 국군 유해 송환은 통일 후에 제일 먼저 할 일”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에서 나타나듯 정부의 안이한 생각을 먼저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국군 유해를 확인하려면 살아있는 같은 세대 유가족의 DNA 확보가 급선무다. 남북관계 경색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가족들이 사망할 수도 있어 확인할 길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에 돌아온 12구 중 확인된 2구를 제외한 나머지 유해는 한국인의 것이라는 증거도 불충분하다”며 “뻔히 인식표도 있는 이갑수 일병을 포함해 하와이에 보관돼 있던 유해를 10년 가까이 모르고 있다가 올해 호국의 달인 6월에 맞춰 송환한 것은 전사자들을 정치적 이벤트에 이용했다는 인상”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언론이 이같은 문제를 지적하지 못한 점도 아쉬워했다.

문 기자는 “남북 당국이 유해발굴송환규정을 정식 체결해 북한에 4만구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국군 유해를 찾아내야 한다”며 “궁극적으로는 국제공조가 필수적이고 참전국의 노력도 추가적으로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