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영국식 권언유착

[글로벌 리포트│영국] 황보연 한겨레 기자


   
 
  ▲ 황보연 한겨레 기자  
 
“기자들과의 술자리를 금하라.”
지난달 29일 영국 경찰서장협회(ACPO)는 경찰과 기자 간의 만남을 규제하는 일종의 언론대응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기자들과의 술자리는 물론이고 점심 혹은 저녁식사도 안된다. 오직 간단한 ‘다과’만이 허락된다. ‘말조심’도 필수다. 기자들과의 대화 내용은 모두 수첩에 기록해뒀다가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오프 더 레코드’로 나눈 은밀한 이야기도 빠뜨려선 안된다.

자칫 언론 취재 자유를 가로막는 것처럼 보이는 엄격한 가이드라인이 나온 배경은 이렇다. 지난해 촉발된 루퍼트 머독 소유 언론사의 휴대전화 불법도청 파문이 발단이 됐다. 특종에 눈이 먼 기자들은 경찰에 뇌물을 주고 정치인과 영화배우 등 유명인사는 물론이고 실종된 소녀의 휴대전화까지 광범위한 불법도청을 일삼아 왔다. 이 과정에서 일부 경찰 간부들이 런던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불법도청에 관여한 기자들과 와인잔을 기울이며 친분을 쌓아온 사실도 드러났다.

이번 사건의 파문은 머독과 영국 정치인들 사이의 유착 관계까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한층 복잡해지고 있다. 최근 영국의 전·현직 총리들은 줄줄이 불법도청 사건을 조사 중인 ‘레비슨 위원회’에 증인으로 서야 했다. 지난해 이 위원회를 출범시킨 장본인인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불법도청 사건의 핵심 인물인 레베카 브룩스(머독 소유 ‘뉴스인터내셔널’의 전직 CEO)와 친밀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가 하면 수년간 승마를 함께 즐긴 ‘절친’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브룩스가 경찰 소유 말을 2년 간 특혜 임대받은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유착 의혹을 키웠다.

증언대에 선 고위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머독 언론과의 친분 쌓기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고백했다. 역시 머독과의 ‘끈끈한’ 관계로 청문회에 선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영국에서는 뉴스와 비평이 뒤섞인 신문 보도가 종종 나온다”며 “그것은 언론이 아니라 정치적 선동 도구가 된다”고 말했다. 힘 센 언론과 잘 지내지 못했을 때 돌아올 부메랑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머독은 영국 정치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에선 그를 ‘24번째 각료’로 일컫는다. 정치인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힘은 머독이 소유한 타블로이드 신문 ‘더선’(하루 판매부수 260만부·영국 ABC 집계)과 정론지 ‘더타임스’(39만부)에서 나온다. 영향력이 큰 매체를 기반으로 선거 때마다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공세를 노골적으로 펴왔다.

한 예로 1997년 블레어 전 총리의 신노동당은 당시 보수당에 등돌린 머독의 응원에 힘입어 정권을 잡았다. 2003년 영국군의 이라크 파병 결정 당시에 그가 머독과 전화통화를 주고받으며 공조를 취해온 정황도 드러났다. 블레어 전 총리는 퇴임 이후에도 머독 딸의 대부를 맡는 등 돈독한 관계를 이어갔다.

레비슨 위원회는 불법도청 사건을 계기로 그릇된 취재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규제 방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여론의 관심은 과연 오랜 관행으로 굳어진 권언유착을 어떻게 뿌리뽑을 것이냐에 있다. 하지만 경찰서장협회가 제안한 것처럼 기자와 취재원 간의 접촉을 아예 차단해버리자는 식의 규제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핵심을 비켜가고 변죽만 울릴 것이라는 우려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에드 밀리반드 영국 노동당 대표는 “머독이 ‘더선’ 혹은 ‘더타임스’ 가운데 하나를 팔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영국 신문시장에서만 34%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머독의 독점적 지위에 제동을 거는 데서 해법을 찾자는 취지다. 호주 출신의 다국적 미디어 재벌인 머독은 1969년 영국에 진출해 ‘뉴스오브더월드’와 ‘더선’을 인수했다. 이후 1981년에는 ‘더타임스’와 ‘선데이타임스’까지 손에 넣었다. 계속 몸집을 불려나갔지만 이런 사업확장이 가져올 부작용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경쟁당국의 까다로운 심사도 없었다.

뒤늦게 머독과 선을 그으려는 노동당도 그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노동당은 한때 미디어 재벌이 신문·방송을 교차 소유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노동당이 1997년 집권 전에 머독과 손잡으면서 그런 계획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사정이 이런데도 머독은 아직도 배고파하고 있고 정치인들은 여전히 그를 돕고 있는 모양새다. 머독은 현재 39%에 불과한 위성방송 ‘B스카이B’의 지분을 완전히 소유하려는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동안 이를 돕기 위해 물밑에서 ‘치어리더’ 역할을 자처해 온 보수당 정부가 이번 파문이 가라앉은 뒤 어떤 태도를 취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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