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경계에 선 '퍼스트 레이디'

[글로벌 리포트│중동·아프리카]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시리아의 다이애나’, ‘사막의 장미’.
한때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의 부인 아스마 알 아사드를 따라다니던 화려한 수식어들이다. 런던의 유복한 시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난 아스마는 유창한 영어실력과 빼어난 미모, 세련된 패션감각에다 여성인권과 아동문제 등에 발벗고 나서면서 시리아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퍼스트 레이디다.

하지만 남편이 벌이고 있는 1년5개월여의 잔혹한 유혈사태엔 침묵으로 일관해 왔고, 무자비한 학살극이 벌어지는 와중에 인터넷 등에서 유럽 명품들을 무더기로 사들이는 초호화 쇼핑을 일삼다가 유럽연합의 경제 제재 대상에 포함되는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아스마에게 절대적 지지와 존경을 보내던 시리아 국민들은 그녀의 세심하고 배려 깊은 듯 비춰지던 과거의 일거수 일투족을 이젠 학살자의 치부를 가려온 교활한 화장술로 인식할 뿐이다.

역시 쫓겨난 이집트 무바라크의 부인 수잔, 튀니지 벤 알리의 부인인 레일라 등도 왕성한 자선사업과 세련된 이미지로 남편의 어두운 이미지를 세탁해 온 대표적 퍼스트 레이디들이다. 특히 수잔 무바라크는 시민혁명으로 남편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던 마지막 순간까지 대통령궁에서 울부짖으며 “내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던 일화로 유명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민혁명 이후 민주선거로 들어선 새 권력의 퍼스트 레이디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특히 지난 달 말 취임한 이집트의 무르시 대통령 부인 나글라는 대통령 취임식을 포함한 공개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몇몇 언론과 한 서면 인터뷰에서 자신을 퍼스트 레이디 대신 아들 모하메드의 엄마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호화판 대통령궁에서 살지도 결정하지 않았다며 한껏 몸을 낮추는 모습이다. 이슬람 전통의상인 희잡을 쓴 채 화장기 없는 얼굴로 사진 몇 장이 언론에 공개된 게 전부지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독재자 가족들의 범접할 수 없는 일상에 염증을 느껴온 이곳 시민들 대다수는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 퍼스트 레이디의 등장에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글라를 포함한 베일 속에 가려진 퍼스트 레이디들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여성의 가정적 역할을 중시하며, 대외노출을 꺼리는 이슬람의 전통에 부합하는 퍼스트 레이디들의 모습은 일견 지나친 정치개입과 권력의 사유화로 비난받던 과거 독재정권의 퍼스트레이디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고려한 또 다른 화장술로 변질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특히 여성에 대한 명예살인과 운전금지가 여전히 논란이 되고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조차 여성에 대한 겁박과 성폭력이 난무하는 아랍권의 현실을 고려하면 정당한 선거로 민주적 권위를 갖춘 권력의 퍼스트 레이디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양성평등과 여성인권 문제에 중요한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인식도 적지 않다.

이처럼 ‘아랍의 봄’이 만들어내고 있는 퍼스트 레이디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논란은 민주주의 보편적 가치와 전통적인 이슬람의 원칙들이 함께 갈 수 있느냐는 아랍권의 고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혁명으로 붕괴한 독재권력의 빈자리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진전 속에 새로운 권력으로 대체되고 있지만 새 권력이 과연 여성의 기본 권리와 인간다운 삶을 위한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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