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나와 묻고 답하다

SBS 편상욱 앵커의 '재능기부 저널리스트' 체험기


   
 
 

▲ SBS 편상욱 앵커


 
 
나는 ‘기부’라는 말을 싫어한다.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에게 ‘베푸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기자협회의 ‘재능기부’ 요청을 받았을 때 망설였다. 과연 나는 ‘기부’ 할 만큼 가진 사람인가? 아직 다 길러지지 않은, 그 무섭다는 10대 청소년들과 한 시간 반을 혼자 보낸다는 것도 두려웠다.

시골 소년이 있었다. 읍내와 마을을 연결하는 버스는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따라 하루에 딱 두 번 다녔다. 텔레비전이라는 기계를 초등학교 때 처음 봤다. 속에 사람이 진짜로 들어있나 싶어 손으로 만져본 적도 있다. 홍수환 선수가 4전5기로 카라스키야를 때려눕히던 날엔 마을에서 유일하게 흑백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있는 집의 안방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환호했다. 그 뜨거움을 나는 기억한다. 어쨌든 나는 그 텔레비전이라는 기계 덕에 직업을 갖고 살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이라는 곳에 처음 와봤다. 서울역 앞의 대우빌딩을 보고 세상에 저렇게 높은 건물이 실재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때의 나와 같은 나이의 여고생들을 만났다. 공부에 지쳐 잠시라도 쉬고 싶은, 피곤한 모습이 역력한 이 어린 학생들을 어떻게 즐겁게 해줘야 하나? 내 고교시절을 기억했다. “여러분은 커서 뭐가 되고 싶나요?” 몇몇이 대답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묵묵부답. “사실은 뭐가 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죠.” 이 말에 아이들의 눈빛이 빛났다.

한쪽에서 귀찮다는 표정으로 거울만 보고 있던 한 학생도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등학교시절부터 오늘까지 내가 해온 실수들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수많은 실수를 하고도 아저씨는 스스로의 인생을 성공이라 생각하고 지금 행복하단다. 그러니 너희들도 공부가 잘 안된다고, 당장 오늘이 즐겁지 않다고 푸념할 필요가 전혀 없단다. 먹장구름이 아무리 두꺼워도 그 뒤엔 항상 태양이 빛나고 있거든…. 인생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변화무쌍한 것이란다.

어느 날 밤의 클로징 코멘트를 이야기했다. “신인 여배우의 자살, 동반자살을 미끼로 한 성폭행, 오늘도 자살과 관련된 우울한 소식들 전해드렸습니다. 목숨은 자신의 것이기에 타인인 제가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견디기 힘들어 죽고 싶다면, 그 전에 바다에 한 번 가보십시오. 폭풍우가 죽을 듯 몰아치다가도 다음날이면 거짓말처럼 평온한 게 바다입니다. 저는 인생도 바다와 비슷하다고 믿고 삽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아이들에게 이메일이 쏟아졌다. “아저씨 때문에 용기를 얻었어요”, “기자는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네요.”

재능기부는 사실 ‘베푸는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나의 재능으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몇이나 있는가? 기부의 가장 큰 수혜자는 자기 자신이고, 기부는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하는 아주 이기적인 행동이다. 한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제 기사에도 여러 번 쓴 그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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