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이름, 백남준
[스페셜리스트│문화] 김소영 MBC 기자·문화부
김소영 MBC 기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2.08.01 15:5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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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영 MBC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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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20일 고(故) 백남준 탄생 80주년을 맞아 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에서 40년 지기 친구인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의 축하 공연과 함께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 전이 시작되었다. 전시 제목은 그가 1992년도에 쓴 글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글에서 백남준은 과거를 되돌아보며 품는 노스탤지어(그리움)는 단순히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며 마치 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피드백처럼 큰 깨달음을 줄 수 있는 행위라고 하였다. 소마미술관에서도 백남준 탄생 8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생각해보니 작년 1월에는 백남준 작고 5주기라며 여러 곳에서 추모전이 열렸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백남준의 탄생과 타계를 번갈아 축하하고 추모하며 전시를 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백남준을 미술가로 기억하지만 시작은 음악에서부터였다. 서양 음악의 8음계에서 처음으로 벗어난 쇤베르크의 12음계 음악에 고등학교 시절부터 매료되었고 독일에서 만난 존 케이지의 공연에서 ‘침묵과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목도하였다. 백남준이 여기에서 멈췄다면 유명한 예술가는 되었을지언정 위대한 예술가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행동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59년 뒤셀도르프에서 열었던 그의 첫 공연 제목은 ‘케이지에게 보낸 찬사’였다. 60년대에 들어서 갓 탄생한 시대의 총아, 텔레비전으로 관심을 옮긴 백남준은 65년에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를 구입한 뒤 시간의 한계를 넘어선 화면의 재생에 매우 흥분하였다. ‘앞으로 텔레비전 화면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라는 말로 비디오아트의 개념을 본의 아니게 천명하게 되었다.
70년대에 한 번 서울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리긴 했으나 신문에 기사 한 줄 나오지 않았다. 정작 그의 이름 석 자는 20년이나 더 지난 1984년에 국내에 처음 알려졌다. 1월1일 뉴욕, 파리, 서울, 베를린 등을 위성으로 연결해 여러 분야의 유명 예술인들의 공연을 전 세계에서 동시 방송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프로젝트의 총연출가가 한국인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였다. 백남준은 2년 후인 86년에 ‘바이 바이 키플링’, 88년엔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손에 손잡고’로 이른바 우주 오페라 3부작으로 불리는 위성예술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었다.
이제 콧대 높은 서양 미술계도 백남준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최첨단 기술이라는 그릇에, 한민족의 조상인 몽골 기마족, 나아가 거대한 유라시아의 북방민족의 혼을 담으려 했던 예술가. 백남준은 스스로 명명한 대로 ‘황색 재앙’이 되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독일관 작가로 나가 황금사자상을 차지하였고, 휘트니 비엔날레에 출품된 현대 미술 작품들을 자비 25만 달러를 들이면서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고스란히 전시하도록 주선해 당시 회화 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던 한국 미술계에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안겼다. 국가도 하기 힘든 일을 몇 년간 혼자서 불타는 추진력으로 밀어붙인 백남준은 결국 뇌졸중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일에 너무 욕심을 부려서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이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농담반 진담반 말하곤 하였다니 보통 대인이 아니다.
백남준이 남긴 예술적 위상은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깔아놓은 예술적 인프라 덕분에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뛰어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휘트니 비엔날레전 이후 수많은 미술학도들이 뉴욕으로, 런던으로, 베를린으로 떠나 제2의, 제3의 백남준을 꿈꾸며 배움에 몰두하였고, 이들이 또 스승이 되어 백남준의 후예들을 키우고 있으니 이보다 큰 영향력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백남준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가 떠난 빈자리에 백남준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피드백의 제곱으로 우리에게 밀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