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슬림은 무엇을 위해 저항했는가

[글로벌 리포트│중동·아프리카]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1년 전 이맘때쯤 기자는 리비아 트리폴리에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진주라 불렸던 트리폴리는 퇴각하는 카다피군과 시민군 사이의 시가전으로 쑥대밭으로 변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 뉴스에서도 여러 번 언급됐던 아부슬림이라는 지역이 있다. 대규모 취재진을 파견한 서방 언론과 그들의 논조를 충실히 따라가기 바빴던 한국 언론들은 그곳이 마지막 남은 카다피 잔당의 소굴이며, 격렬한 저항으로 인명피해가 속출하고 있다고 속보를 날려댔다. 그리고 실제로 전투가 마무리된 아부슬림에서는 병원마다 수백 구의 시신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현장을 취재하던 대부분의 기자들은 그 장면을 그저 피비린내 나는 내전과 잔혹한 카다피 정권의 말로를 보여주는 장면쯤으로 여겼고, 그렇게 1년여의 시간과 함께 망각의 강으로 그 장면들을 흘려보냈다. 언론인들이 그랬으니 아마도 기사를 접한 시민들의 기억 속에선 아예 아부슬림이라는 지명조차도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미디어 기술의 놀라운 발전과 함께 총알과 포탄, 유혈이 낭자한 자극적인 영상과 음향 속에 전쟁의 참상은 생생히 안방에 전해지지만 마치 무슨 게임의 한 장면처럼 쉽사리 무감각해져 간다. 그리고 정작 그들이 왜 싸웠는지, 왜 아부슬림은 전 세계가 미치광이 독재자로 취급하며 저주를 퍼부어대던 카다피 체제를 위해 그렇게 격렬히 저항했는지 따위의 질문은 거추장스러워한다. 이미 시청률을 올릴 만큼 올린 드라마처럼 뉴스도 끝났기 때문인가?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영국의 한 반전단체는 리비아 내전의 뒤에 도사린 서구 자본의 음모를 비판하며 바로 그 아부슬림의 비극을 거론했다. 리비아 왕정 시절부터 아부슬림은 트리폴리의 대표적 빈민촌으로 리비아 전역에서 모여든 저소득층의 집결지였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카다피는 집권 초기 석유자본 국유화를 비롯한 강력한 개혁을 바탕으로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체제를 도입한다. 가난과 굶주림, 천대와 멸시조차 ‘알라’의 계시로 여기며 일생을 보내던 아부슬림의 빈민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향유하게 해 줄 안전망이 마련되자 카다피 정권의 강고한 버팀목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래서 아부슬림의 격렬했던 시가전은 그저 단순한 친카다피 세력의 저항이 아니라 적어도 그 체제에선 보호받을 수 있었던 ‘인간의 권리’가 있었고, 그걸 지키려 했던 몸부림이라는 게 그 반전단체의 설명이다.

물론 카다피 체제의 몰락은 정적 몰살과 고문 등 또다른 인권의 한 축을 유린하다 맞이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1년여가 지난 지금 절대 악(惡)처럼 평가받던 독재권력의 빈자리는 치열한 권력투쟁의 혼란 속에 ‘재건’의 깃발을 든 서구 자본의 상륙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 국유화됐던 막대한 석유개발의 이익이 시민군의 편에서 내전을 지원했던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등 서구 자본의 먹잇감이 될 것이라는 일반적 관측은 서서히 현실화되고 있다. 그리고 내전으로 망가진 보건, 의료, 교육, 행정 등 거의 모든 영역의 ‘재건’은 이미 새로운 권력과 그와 결탁한 외부 자본, 바로 시장의 손에 맡겨지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어 보인다. 당장은 시스템이 정상화되고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시장의 효율성에 환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새로운 투쟁의 시작일 수도 있다. 바로 그 시장에서 거래될 새로운 상품은 다름 아닌 그들이 당연히 누리던 ‘인간의 권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시민혁명으로 30년 무바라크 독재를 몰아낸 이집트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다. 시민혁명 이후 극심한 경제난 속에 새로 출범한 무르시 정부는 IMF에 48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요청했지만 시민사회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IMF의 요구조건인 재정적자 감축 등을 위해 오랜 세월 국가가 보조해 왔던 기간산업과 연료 보조금 등이 전면 철폐 혹은 축소되면서 50여 년간 서민들이 의존해 온 값싼 국영빵집마저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으로 세워진 새 정부는 파산을 막기 위해 ‘빵을 달라’는 혁명의 요구를 배신해야 할 지 모르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진 것이다.

지난 1990년대 초반 한국보다 먼저 IMF 구제금융을 지원받고 물가폭등과 빈부격차 확대 등 혹독한 경험을 치렀던 이집트 사람들은 최근 카이로를 찾은 라가르드 IMF 총재를 머리카락에 뱀을 감춘 메두사로 묘사하기까지 한다. IMF 구제금융 이후 중산층이 몰락하고 사회적 갈등과 빈부격차가 극심해진 한국의 경험에 비교해 봐도 이집트인들의 격한 반응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내전과 혁명은 끝났고 ‘아부슬림’같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도 없지만 이제 민주주의에 눈을 뜨기 시작한 북아프리카의 시민들도 한국의 시민들이 겪고 있듯 총칼과 군홧발 대신 모든 걸 상품화하며 자신의 삶을 통제할 ‘냉혈한’과의 훨씬 더 어렵고 기약 없는 싸움에 이미 깊숙하게 휘말려 들고 있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