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선생 두개골서 6Cm 뻥뚫린 구멍…타살의혹 재점화

제264회 이달의 기자상 취재보도 / 한겨레 박경만 기자


   
 
  ▲ 한겨레 박경만 기자  
 
장준하 선생과 인연을 맺은 것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로로 빽빽하게 적힌 ‘돌베개’에서 받은 감동이 아들의 이름을 ‘준하’라 짓게 만들었다.

편집기자로 20년을 보낸 뒤 늦깎이 취재기자가 돼 장준하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됐다. 지난해 8월 경기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선생의 묘소가 홍수로 무너져 내렸다는 제보를 받았다. 가슴에 평생 장 선생을 담고 살아온, 투박한 인상을 가진 60대 제보자를 이후 여러 차례 만났다. 장준하 추모공원을 추진하던 제보자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거나 기자실에 찾아와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고, 어떻게 하면 일이 잘 풀릴지 상의하려 했다.

8월14일 아침, 사흘 뒤로 예정된 파주 통일동산의 ‘장준하 공원’ 제막식 준비가 잘 돼가고 있는지 궁금해 전화기를 들었다. 제보자는 한참 동안 다른 얘기를 하다가 최근 선생의 묘소를 통일동산으로 이장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번개처럼 무언가 스쳐갔다. 유골을 봤냐, 상태가 어떠냐는 물음에 그는 주저하듯 유골의 모양새를 띄엄띄엄 얘기해줬다.

사내 집배신에 메모를 올렸더니 편집국 고위간부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장준하추모공원추진위원회 사무총장, 유족 등과 인터뷰를 통해 오른쪽 귀 뒷부분 후두부에 망치 같은 것으로 맞은 듯한 6㎝ 크기의 원형으로 함몰된 흔적과 서울대 의대 법의학 교수가 유골검증에 참여해 ‘자연적으로 생기기 힘든 상처’라는 소견을 냈다는 구체적인 팩트를 챙겼다.

‘운칠기삼’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유족 등은 함몰된 유골에 대해 2주 동안 함구하면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다가 뜻밖에 나를 만난 것이다.

이후론 일사천리였다. 편집국장은 지면을 활짝 열어줬고,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취재로 지면을 채워갔다. 장준하 선생의 장남 인터뷰를 통해 가장을 잃고 억압받으며 살아온 가족의 설움과, 의문사에 대한 전면 재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제2기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의 장준하 선생 전담 조사관을 만나 ‘단순 추락사가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는 당시 조사결과도 실었다. 민주통합당에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진상조사위원회가 설치됐고 암살의혹 규명 국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되는 등 파장이 커졌다.

한 달여 동안 정신없이 쫓아다니다 보니 어느 날 ‘장준하 전문기자’ 쯤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진상규명을 해낼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민주언론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책무라고 생각한다. 귀한 상까지 받고 보니 책임감이 더욱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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