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벌써 불혹의 나이라니
[스페셜리스트│문화] 김소영 MBC 기자·문화부
김소영 MBC 기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2.10.10 15: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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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영 MBC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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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도 적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올해처럼 나이를 실감한 적은 없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기에 걸리더니, 날이 흐리기 전날은 무릎도 조금씩 시큰거린다. 건망증이 생겼다. 회사일은 손에 익었지만 대신 업무량이 엄청 늘었다. 선배 눈치는 기본이고 이제는 후배 눈치까지 슬슬 봐야 하는 어정쩡한 중간 관리자. 아껴 쓰고 절약해도 애들 교육비에 허리가 휘청거리며 노후대책이 걱정된다. 드라마에서 이별을 앞둔 남녀 주인공이 눈물을 펑펑 흘려도 마음이 동하지 않지만, 굴러다니는 낙엽을 보니 싱숭생숭해지는 나는, 올해 마흔이다.
그래서일까 매주 새로 나오는 책들을 분류하다보니 마흔에 관한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나오는 줄 몰랐다. ‘마흔, 인간관계를 돌아봐야할 시간’이라는 책이 나온 게 엊그제 같은데 어제는 ‘마흔에 꼭 만나야 할 사람 버려야 할 사람’이 나왔다. 일도 그렇지만 인맥도 끊을 건 끊고, 안고 갈 건 안고 가라는 것이다. 왜? 40대는 은퇴 후 8만 시간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마흔 살의 승부수’, ‘모리 차장의 비밀과외’, ‘남자 리뉴얼’ 등은 회사에 잉여 인력이 되지 않고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 지, 박차고 나오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제시해준다.
젖은 낙엽 꼴이 되지 않기 위해 마흔부터 준비해야 한다. 말만 들어도 피곤해지는가? 안 된다. 그러니까 마흔엔 인문학으로 정신을 재무장해야 된다고 난리인 것이다. ‘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 ‘마흔에 읽는 동의보감’ 뿐이랴. ‘삼국지’, ‘논어’, ‘손자병법’, ‘삼국지’ 안내서는 기본이다. 모두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이며 ‘40대, 다시 한 번 공부에 미쳐라’하고 외친다. 한숨이 나온다면 아는 것부터 잘 정리해보자. 알고 있는 지식만 잘 정리해서 책으로 내면 전문가로 평생 현역처럼 살 수 있다고 얘기하는 ‘마흔, 당신의 책을 써라’도 나왔다. ‘마흔 이후, 이제야 알게 된 것들’을 접하고 나니 말 그대로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마흔은 ‘중년수업’을 받아야 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소장은 2008년 일본 TBS 방송사에서 ‘아라포’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나서 마흔 살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아라포는 어라운드포티(Around Forty)를 줄인 단어로 마흔 즈음의 미혼 여성을 뜻한다. 이들은 인생의 전환기에서 구매력이 높은 계층이다. 일본의 출판 유행은 3~4년 후에 한국에서 반복된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한국은 그의 주장처럼 마흔 열풍이다. 신기하게도 마흔살 남자들의 일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 <신사의 품격>도 큰 인기를 끌었다. 마치 남성판 아라포처럼 말이다. 사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고령사회가 됐지만 고령화 속도는 우리가 일본보다 빠르다. 그러니 출판계의 마흔 바람이 유별난 유행이라고 볼 수는 없다.
공자가 마흔이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이라 했다지만 그때는 10대에 결혼해 40대에 할아버지가 될 때의 통찰이다. 21세기는 평균수명 100세 시대에 접어들었으니 마흔 살은 백 살의 절반도 되지 않은 청춘이다. 그러나 그것은 회색의 청춘이며 이렇게 많은 책들로부터 조언을 받아야 하는 무거운 청춘이다. 나는 지구를 짊어진 아틀라스가 마흔 살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마흔 살은 각자 자신만의 지구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라고 시인 이문재는 오후 세시 염전 앞에서 그렇게 마흔 살을 허망하게 읊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한 번 사는 인생이니 대충 살 순 없는 것이고, 마흔의 방황도 선조보다 2배나 길게 사는 만큼 사춘기 질풍노도를 두 번 겪는 것이라 생각하는 여유,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것 같다. 이제 마흔은 불혹의 나이가 아니라 진짜 불혹의 상태가 되기 위해 유혹을 견디어야 하는 연옥의 나이라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