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말춤'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편집위원회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2.10.17 14:40:03
“마치 영화 트루먼 쇼나 몰래카메라 같다.” 요즘 대세인 가수 싸이(본명 박재상)의 소감이다.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월드스타가 된 자신도 지금 현실이 실감나지 않는 모양이다.
아이돌 가수와는 차별화된 외모와 음악 색깔을 지닌 그는 이전에도 넓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사실 톱가수로 분류되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의 10여 년간 가수생활은 굴곡 그 자체였다.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 중단 위기에 처했는가 하면, 한국인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병역비리 의혹에 휘말려 군대를 두 번이나 다녀오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이젠 국민영웅 대접을 받으며 반전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이다.
‘온갖 역경에도 한 우물을 파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과 교훈의 메시지가 담긴 싸이의 이야기는 애국심을 자극하는 그의 언행과 더해져 하나의 성공신화로 자리 잡았다. ‘옵옵옵옵옵 오빤 강남스타일’이라는 구절만 나와도 우는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고 한국 영화와 방송, 관광, 의류,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싸이 열풍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1조원 가량에 이른다고 한다.
이슈를 따라가는 언론이 싸이를 주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네이버 검색창에 ‘싸이’라는 단어를 넣으면 지난 한 달간 관련 기사가 2만2000여 건에 달한다. 같은 기간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2만8000여 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관련 기사는 각각 2만5000여 건이다. 기사 빈도만 봐서는 대통령 선거를 석 달 앞둔 유력 대선 후보들과 싸이의 위상은 별반 차이가 없다. 어찌 보면 대선후보들보다 미국의 NBC 투데이쇼 생방송에서 한국어로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친 싸이가 국민의 갈증을 더 해소해줬을 수는 있다.
싸이의 달라진 위상을 반영하듯 유튜브는 싸이의 시청공연을 전 세계에 생중계했고 시청 앞에 모인 8만여 명 인파의 사진은 국내 조간신문 1면 첫머리를 일제히 장식했다.
하지만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던가. 언론이 대중처럼 흥분할 필요는 없다. K팝이 진정한 경쟁력을 갖춘 것인지, 1990년대 스페인의 마카레나 춤처럼 반짝 열풍에 그칠 것인지 차분하게 진단하는 기사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싸이의 노래가 영국차트 1위, 미국 빌보드차트 2위에 오른 그 자체만으로도 K팝이 세계에서 통한다는 방증이라는 논조가 대부분이다.
남다른 천재성을 지닌 이들이 몇 명 나왔다고 해서 ‘한국=문화강국’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성급하다. 김기덕 감독이 영화 ‘피에타’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고 해서 한국 영화의 다양성과 인프라가 그만큼 잘 갖춰져 있다고 보는 사람은 드물다. 냉정한 평가 없이 지나친 찬사는 기대치만 높이고, 오히려 저변확대 등 해당 분야의 투자를 소홀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이제 한국 언론의 관심은 스포츠 경기를 중계하듯 싸이가 언제 빌보드 차트 1위로 올라서느냐에 쏠려 있는 듯하다. 오죽하면 싸이열풍 때문에 우리 사회의 다른 이슈들이 묻히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불산가스 누출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구미 주민들은 “이런 대형사고가 싸이 공연 소식보다 가치가 없는 것 같다”고 자조했다고 한다. 이러다 언론까지 직접 나서 말춤을 추는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진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