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세 BBC 앵커우먼의 퇴진과 한국여성

[글로벌 리포트│영국]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버밍엄대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  
 
영국 신문에서는 누구 얼굴을 가장 자주 보게 될까.
조금 엉뚱한 질문이지만 실제로 이걸 조사한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의 ‘여성언론인모임(Women in Journalism)’은 영국의 9개 주요 언론의 1면에 한달 동안 나온 기사를 분석했다. 지난 15일 ‘가디언’ 지는 1면에 이 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내용이 흥미롭다.

영국 신문의 1면을 가장 자주 장식한 사람은 케이트 미들턴 영국 왕세손비였다. 영국에 와서 새삼 확인하는 것이지만 왕족의 일거수일투족은 국민적 관심사다. 젊고 아름다운 ‘신데렐라’가 여론의 주목을 받는 것이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대략 훑어보면 3위는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었고, 5위는 역시 윌리엄스 왕자가 차지했다. 물론 영국의 여성언론인모임이 이런 한가한 내용이나 확인하려고 신문을 훑은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이번 조사를 통해 중앙 일간지 1면에 나타난 성차별적 요소를 확인했다. 다시 ‘인기 순위’로 돌아가보자. 1면 사진에 얼굴이 가장 많이 노출된 10명을 확인해보니 여성은 3명뿐이었다. 그런데 면면을 살펴보면 뭔가 이상하다. 왕세손비를 제외하면 실종 어린이(매들린 매칸, 4위), 왕세손비의 동생(피파 메들턴, 9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성들이 대부분 정치인인 것과 대별된다. ‘가디언’은 기사에서 “10명 가운데 여성 정치인이나 여성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풀이했다.

왜 그럴까. 여성언론인모임은 언론사의 남성 중심적 문화에 혐의를 뒀다. 모임은 1면에 기사를 쓴 기자의 성별을 확인한 결과도 내놓았다. ‘가디언’, ‘더 타임즈’ 등 주요 매체의 1면에 나온 기사 630건 가운데 남자 기자가 작성한 비율이 78%(493건)였다. 주요 기사 5건 가운데 4건은 남자 기자가 작성했다는 뜻이다. 노동당 해리엇 하먼 부당수는 “남성 기자들이 결국 의회의 남성(의원)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여성 입장에서는) 이중고입니다”라고 말했다.

여성언론인모임이 소개하는 다른 통계들도 미디어의 편향을 드러냈다. 9개 신문의 1면에서 인용한 전문가들의 76%가 남성인 데 견줘, 신문에 등장하는 피해자들 가운데 79%는 여성이었다. 말하자면 여성은 주로 당하고 남성은 주로 코멘트하는 셈이다.

물론 이렇게 드러나는 편향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전문가와 피해자들의 성별 분포가 실제로 불균형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남성 기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신문에서 전문가와 피해자를 고를 때 편향을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디언’은 어느 쪽이 원인인지는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물론 어느 쪽이든 불행한 것은 마찬가지인 셈이다. ‘가디언’은 같은 날 사설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만약 다른 별에서 외계인이 신문을 본다면 아마도 우리의 공적 영역에는 남자와 일부의 젊고 예쁜 여성만 있을 거라고 생각할 듯하다.” 이렇게 말하는 ‘가디언’은 그나마 나은 매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말과 행실은 따로 놀았다. 1면 기사를 쓴 남성 기자의 비율은 전체 평균(78%)과 정확하게 같았고 1면 사진에 등장하는 남성의 빈도도 9개 언론사 가운데 4번째로 많았다.

영국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의 언론사에서도 여성 기자들의 비율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영국보다 덜 하지는 않을 듯하다. 필자도 간단히 점검을 해보았다. 지난 15~20일까지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1면 기사를 훑어봤다. (필자가 영국에서 사용하는 유료 신문 지면 리더 프로그램에 뜨는 한국의 종합일간지는 저 두 곳뿐이다.) 남성 필자로 추정되는 이름은 31건으로 여성 이름(6건)보다 훨씬 더 많았다. 영국 평균(78%)보다 우리나라가 6%포인트가 더 높다. 한국과 영국 사이에는 이런 수치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큰 차이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국에서는 적어도 이렇게라도 공론화하는 문제가 한국에서는 딱히 이렇게 구체적으로, 공개적으로 문제제기가 되지도 않는다는 점 말이다.

한 가지 더. 영국의 여성언론인모임에서는 보고서를 통해 BBC가 아나운서나 프로그램 진행자들을 인사 배치할 때 나이 든 여성들에 대해 차별적이라고 압박했다.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해서 검색해보았다. 지난 2007년 영국의 앵커우먼인 모이라 스튜어트가 57세의 나이로 프로그램에서 하차했을 때 BBC는 그가 나이 많은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샀다. 57세라.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의 여성 앵커들은 참 젊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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