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후보들의 중동에 대한 심각한 무지

[글로벌 리포트│중동·아프리카]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금융위기와 전쟁, 테러가 지배했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21세기 첫 10여 년의 한복판엔 늘 아랍과 중동, 이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9·11 테러로 시작된 공포에 대한 탐닉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져 중동을 다시 한 번 포연의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고, 이는 다시 재정적자와 자산버블 붕괴로 연결되며 자본주의의 뇌관을 건드려 초강대국 미국에 최악의 금융위기를 선물했다. 공포를 탐닉했던 자들에 대한 보복이라고 할까?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논리로 국제사회를 겁박했던 미국의 오만이 치러야 할 자업자득 같은 것이지만, 이로 인해 중동과 이슬람권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감당하고 있다.

막대한 재정적자와 고조될 만큼 고조된 반미감정, 꼬일 대로 꼬인 테러전쟁의 실타래를 상속받은 오바마에겐 중동정책의 유연한 변화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이 선택은 세계사의 한 장면으로 후세에 기억될 ‘아랍의 봄’에 불을 당긴 도화선이 됐다. 재정적자와 금융위기 탈피를 위한 이른바 양적완화, 달러화 찍어내기는 세계 자산 거품의 폭발적 확대에 맞물려 국제 곡물가격의 폭등을 불러와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아랍권 민중들의 삶에 직격탄을 날렸다. 또 대테러전쟁을 고리로 미국의 지원에 의존해 온 아랍권 독재자들에게도 오바마는 더 이상 예전 같은 큰 형님일 수 없었다.

그리고 ‘봄’이라 불리는 혁명이 도래했다. 독재자는 도망치거나 영어의 몸이 됐고 혹은 십수개월째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벌이며 자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독재자가 물러난 곳에선 선거와 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뤄지고 있지만 물가폭등과 외화고갈, 살인적인 실업 등이 국가 기반을 뿌리째 흔들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뿌리깊은 적대감과 공생해 온 근본주의는 서방과 아랍의 갈등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그래서 아랍의 봄 이후에도 전쟁과 분쟁의 그림자는 이 지역에 늘 짙게 드리워 있다. 주변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시리아 내전이 그렇고 이란과의 전쟁 돌입에 대한 신임투표 성격으로 조기총선을 앞둔 이스라엘의 상황이 또 그렇다. 며칠 남지 않은 미국 대선에서 중동 문제가 핵심적 논쟁의 주제로 떠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아마 미국 대선에서 이스라엘 강경 보수 세력과 손을 잡은 롬니 후보가 당선된다면 중동의 긴장은 한층 고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런 중동의 정세 변화는 여전히 원유 수입의 절대량에 의존하며 경제의 생사여탈권을 위탁하다시피 하고 있는 한국에게도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역시 대선을 앞둔 한국의 선거판에선 도무지 세기적 변화를 맞고 있는 아랍과 중동지역에 대해 정치세력들이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주변 4강 외교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관심의 정도가 심각하다. 이런 식이라면 이명박 정부 들어 대미 편중 외교 속에 팔레스타인 문제나 이란 핵 문제를 둘러싼 석유수입 제재 등을 둘러싸고 한 번도 자기 목소리를 내 보지 못한 채 ‘자원외교’라는 수사로 아랍과 중동지역에 대한 빈약하고 천박한 인식을 가리려 했던 대외정책의 한계는 누가 당선되든 다음 정부에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난 해 시민혁명으로 무바라크 독재가 무너진 직후 이집트 임시정부 부총리를 만났던 한국의 한 장관급 인사는 “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한국의 기업들은 아무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집트에 대한 한국의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돌아온 부총리의 대답은 이랬다. “한국기업이 남아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인 것 아닌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은 아니지 않나?”

상대로부터 이익을 노리거나 앞세운 외교는 발걸음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노선으로는 진짜 친구를 만들지 못한다. 상대도 내가 줄 수 있는 이익만큼만 마음을 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아랍인, 중동과 진짜 친구가 될 준비가 돼 있는가? 아니 그런 질문을 던지기라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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