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마트에 비친 지구촌 모습
[글로벌 리포트│미국] 이태규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
이태규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2.12.19 15: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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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규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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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역이 쇼핑 광기에 빠져든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인 지난달 23일. ‘1달러의 가치를 소중히 한다’는 세계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에 가장 많은 소비자가 몰린 건 당연했다. 월마트는 이날 500달러가 넘는 아이패드2를 399달러에 내놓고 75달러짜리 기프트카드까지 경품으로 주었다.
일부 매장 밖에서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지만 사람들의 눈은 전시된 상품을 떠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가격에 판매되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파격적인 가격표들이 붙어 있었다. 시위를 벌인 노동자들이 요구한 최저임금은 기존보다 47센트 많은 시간당 13달러. 소비자가 몰리는 이날, 월마트의 부당함을 알리고 매출에 타격을 주려는 의도가 깔린 시위였지만 월마트는 보란 듯이 이날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월마트는 미국 최고의 수익 기업이자 수십 년째 무노조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이를 비판하는 미국 소비자 10%가량이 월마트를 찾지 않겠다며 압박했을 때도 월마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주 2억명의 소비자가 ‘매일 염가(Always low price)’를 제시하는 27개국 약 1만300개의 매장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매사추세츠공대(MIT) 슬론경영대 리차드 로크 부학장은 월마트의 염가에 대해 “소비자들인 우리는 일찍이 없던 품질에 가격까지 저렴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면서 “그러나 누군가가 그 비용을 부담하고 있지만 소비자들은 그것을 알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공교롭게 블랙 프라이데이 다음날인 24일 그 비용을 떠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구 반대편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30km 북쪽에 위치한 아슐리아 공단의 8층 건물 타즈린패션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공장 안에서 일하던 노동자 600여 명 가운데 112명이 희생되고 200여 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였다. 하지만 공장에 비상구가 한 개라도 있었으면 희생자들이 쉽게 탈출해 피해를 줄일 수 있던 인재였다. 1911년 뉴욕 맨해튼에서 발생한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화재 때 출입문이 봉쇄돼 노동자 146명이 희생된 참사와 장소만 다를 뿐 거의 동일했다.
불이 난 타즈린패션 공장은 월마트, 시어스, C&A 등 미국과 유럽의 다국적 업체의 주문을 받아 의류를 생산, 납품해온 곳이다. 화재 발생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월마트의 납품기일을 맞추기 위해 생산라인 거의 전부가 가동됐다. 소비자들이 월마트에서 구매한 자체 브랜드(Faded Glory) 일부는 이렇게 타즈린패션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유럽계 C&A는 이 공장에 스웨터 22만 벌을 주문했고, 미국 해병 로고가 달린 의류도 여기서 생산됐다.
희생자 대부분이 여성인 노동자들은 이곳에서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하루 12시간씩 일주일 내내 일하며 한 달에 45달러 가량의 쥐꼬리 월급을 받았다. 이들이 만약 연간 평균 수입이 2만5000달러 미만으로, 미국에서도 저임금으로 악명 높은 월마트에서 이처럼 열심히 일했다면 그보다는 500배는 더 받았을 것이다. 로크 부학장은 그 누군가 부담하고 있던 염가 상품의 (숨겨진)비용을 바로 타즈린패션 공장의 불 속에 있던 사람들이 안고 있었다고 했다.
저개발 지역의 싼 임금을 찾아다니는 월마트 같은 다국적 회사들은 이미 노동자가 넘쳐나는 방글라데시로 대거 몰려가 있다. 방글라데시 수출품의 80%가 의류이고, 수출대상국은 이들 회사가 있는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인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 덕에 방글라데시는 중국에 이어 연간 190억 달러의 세계 2위 의류수출국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화재 이후 월마트, 시어스 등은 재하청 기업인 타즈린패션이 자신들의 의류를 생산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신자유주의 바람 속에 생산과정을 여러 개로 쪼개 세계에 분산 배치시킨 글로벌 유통·의류 산업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비평가 아드리안 살루치는 타즈린패션 참사에서 나타난 인간 가치의 차이를 비판하며, 현실 속 국가별 사람 가치를 계산했다. 그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미국인 1인의 상대적 가치는 영국인 2명, 캐나다인 4명, 독일인 10명, 이집트인 100명, 멕시코인 1000명, 이라크인 1만명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또 리비아인과 시리아인은 수백에서 수천명이 있어야 미국인 1명의 가치와 동등해진다고 살루치는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