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한국과 이집트
[글로벌 리포트│중동·아프리카]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3.01.09 14:3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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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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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인들에겐 겨울이 새롭다. 2년 전 겨울 튀니지 시골 청년 부아지지의 절규와 분신으로 촉발된 혁명의 기억이 그들의 삶을 바꿔놨기 때문이다. 압제에 억눌렸던 거리엔 변화를 요구하는 구호가 넘쳐 흘렀고, 시민들의 가슴엔 희망이 강물처럼 흘렀던 게 그리 머지않은 과거다.
하지만 지금 카이로의 겨울 하늘과 그 하늘을 뒤덮은 모래폭풍은 유난히 짙고 탁하다. 그것이 단지 겨울이라 생명을 억압하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딛고선 현실이 그 계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30년을 호령하던 독재의 기억에서 갓 벗어났지만 나의 삶이 거창하지 않아도 뭔가 바뀌리라 기대했던 거리의 수많은 아흐메드와 모하메드들은 이제 점점 체념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민주주의와 빵을 달라던 혁명의 구호는 아직도 구호에 머물러 있고, 독재자의 빈 자리엔 갈등과 반목, 그리고 반혁명의 음침한 기운이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이념을 뛰어넘어 인간다운 삶을 위해 연대했던 자들은 서로 등을 돌렸고, 민주선거로 선출된 새로운 권력자 무르시 대통령은 그것이 민생을 위한 길이라며 물러난 독재자의 방식을 흉내 내려다 나라를 사분오열시키고 있다. 입으론 위기와 민생을 얘기하지만 반대세력을 민생을 위협하는 국가전복세력으로 내몰고 언론을 통제하려는 공안통치의 방식까지 무르시 정권은 잊고 싶은 과거의 방식으로 빠르게 회귀하고 있다.
이처럼 시민혁명이 미래를 전망하기 힘든 혼돈으로 귀결될 것이라던 몇몇 전문가들의 불길한 예언은 불행히도 점점 현실이 돼가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 평등을 지향했던 혁명의 정신은 종교에 기반한 새로운 권력과 도처에서 충돌하며 좌초하거나 변질돼 가고 있다. 시민들의 피로 일궈낸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은 소중한 혁명의 성과지만 그 자체로 혁명의 요구는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본다면 이집트인들이 얻어낸 절차적 민주주의는 막강한 조직력과 종교적 배경을 등에 업은 정치세력에게 가장 유리하게 작용했고 그들 속에 잠재한 독재의 DNA를 진화시키는 효율적인 통로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혼돈에 가장 민감한 곳이 바로 시장이다. 독재회귀와 이슬람화에 대한 우려는 곧바로 환율폭등과 자본이탈을 불러왔고, 이집트는 이제 두 번째 IMF 구제금융 지원이 없으면 디폴트로 빠져들 위기에 직면해 있다. 민생을 이유로 차용했던 ‘독재’의 도구들이 오히려 시장의 붕괴와 민생의 파탄을 초래한 주범인 셈이다.
이집트의 혼란을 바라보는 심정은 여러 모로 복잡하다. 우리가 선험한 과거의 길이 이들과 닮아 있고, 우리의 오늘이 또한 이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희생으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공간을 확장시킨 87년 체제는 독재의 유혹에 가까이 서 있는 정치세력에게 합법적 집권기회를 열어줬다. 그리고 새 집권세력에게서 가장 흔하게 듣고 있는 말이 바로 ‘민생’이라는 것도 이집트의 풍경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벌써부터 유쾌하지 못한 독재의 체취가 집권세력의 주변에서 풍겨나오는 것은 그래서 더 걱정스럽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국가전복세력’으로 몰아세우던 극단적 인사들의 중용이 그렇고, 국민의 눈과 귀가 돼야 할 언론의 기사 판단까지 나서서 챙겨주는 새 권력의 과잉친절은 ‘기관원’들에게 검열 당하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과거의 방식과 인물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면 권력자가 말하는 ‘민생’은 가장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단어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 뒤엔 이집트의 현재가 보여주듯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진짜 민생의 위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