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앤 롤링의 분노

[글로벌 리포트│영국]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버밍엄대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속은 기분이다. 화난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 연말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 보낸 기고에서 영국 수상 데이비드 캐머런을 대놓고 비난했다. 세계적인 작가가 수상에게 이렇게까지 날을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사연은 이렇다.

지난 2011년 7월 캐머런 영국 수상은 언론의 취재와 보도 행태를 포괄적으로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타블로이드 신문인 ‘뉴스 오브 더 월드’의 탈법적인 취재 행태가 문제가 됐다. 신문은 취재 과정에서 살인사건 피해자의 과거 통화 내용을 무단으로 해킹하다가 덜미가 잡혔다. 이 신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영국 언론계 전반에 만연한 탈법적 관행은 위원회의 도마 위에 올랐다. 브라이언 레버슨 경이 이끄는 조사위원회는 언론의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두루 청문회에 호출했다. 영국의 배우 휴 그랜트, 시에나 밀러와 작가 조앤 롤링 등이 청문회에 나와 사연을 호소했다.

공익을 명분으로 내세운 언론의 행태를 보면 취재를 가장한 범죄였다. 기자들은 살인 피해자의 보이스 메일을 해킹한 뒤 사건의 증거가 될 수도 있는 메일을 삭제하는 극악스러운 짓을 했다. 또 실종된 4세 아동의 부모를 범행 공모자로 모는 어처구니 없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3류 언론의 일탈이 아니었다. 전국 구독부수 10위 안에 있는 언론사들의 행태였다. 유명인들이 호소한 사생활 침해나 통화기록 해킹 등은 차라리 경범죄로 보일 정도였다.

불법을 주도한 언론사의 사주들도 청문회에 호출됐다. 누구보다도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의 등장이 일반인의 관심을 끌었다. ‘뉴스 오브 더 월드’, ‘더 선’, ‘더 타임즈’ 등 유력 언론사를 두루 거느린 머독은 돈이라면 물불 안가리는 경영 방식 때문에 영국 언론의 전반적인 타락을 자초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문제적 인물인 머독과의 관계가 깨끗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캐머런 수상은 물론 토니 블레어 전 수상까지 줄줄이 청문회에 불려 나왔다. 영국 정계에서는 총선의 승리를 위해서는 머독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블레어와 캐머런 모두 머독의 노골적인 지원을 등에 엎고 다우닝가에 입성할 수 있었다.

무려 17개월 동안 조사를 진행한 레버슨 위원회는 지난해 11월 2000쪽에 이르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딱히 새로운 사실은 없었다. 대신 위원회는 언론의 횡포를 막기 위해 언론과 정부의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감시기구를 설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막장까지 간 영국 언론에 대한 극약처방이었다.

언론은 물론 호의적이지 않았다. 황색언론에 가까운 ‘더 선’이나 ‘더 데일리 메일’뿐만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정론지로 알려진 ‘데일리 텔레그라프’와 ‘더 타임즈’까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 주된 논리였다. 주요 언론사 가운데는 ‘가디언’만이 약간 다른 목소리를 냈을 뿐이었다.

정작 칼자루를 쥔 정계의 반응은 어땠을까. 야당인 노동당의 에드 밀리반드 당수는 레버슨 보고서의 제안을 찬성하고 나섰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문제는 여당이었다. 캐머런 수상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그는 감시기구의 구성에 대해 “매우 우려스러운 (제안)”이라고 두어발 빠져나갔다. 머독에게 특혜를 밀어준 정황이 드러난 문화장관도 캐머런 수상은 싸고 돌았다. 왜 그럴까. 알고 보니 캐머런 수상 스스로가 머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캐머런 수상은 2010년 취임한 뒤 뉴스코퍼레이션 쪽의 인사와 5차례 이상 비밀 회동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사실을 폭로한 사람은 다름아닌 머독의 아들인 제임스였다. 부인하기 힘든 증거였다. 또 캐머런 수상이 2010년 총선에서 승리한 뒤 수상 관저의 홍보국장으로 중용한 앤디 쿨슨은 문제의 ‘뉴스 오브 더 월드’의 편집국장 출신이었다.

지난 2011년 6월 런던 국회의사당에서 벌어진 시민단체의 집회에 등장한 퍼포먼스를 보면 캐머런과 머독 사이의 관계를 알기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머독의 가면을 쓰고 등장한 이는 캐머런의 얼굴을 한 꼭두각시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한국의 전임 대통령 말을 빌리자면 영국에서 권력은 이미 ‘머독에게’ 넘어간 셈이다. 민주주의의 본산이라는 영국의 민주주의는 호주 출신의 80대 자본가의 손에 너무 쉽게 농락당하고 있다. 조앤 롤링의 분노에는 이런 안타까움이 묻어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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