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단계 접어든 이집트 시민혁명
[글로벌 리포트│중동·아프리카]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3.02.20 16: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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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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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혁명 발발 2주년을 즈음한 시위가 벌어졌던 지난 달 하순. ‘코샤리 혁명’의 성지 이집트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곳곳엔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들과 맨 머리를 드러낸 여성들이 뒤섞여 있었다. 종교와 계층은 달랐지만 이들의 손엔 여성차별에 대한 항의문구가 들려 있었고, 인권과 민주주의 진전을 요구하는 똑같은 구호가 터져 나왔다. 2년 전에도 이집트 여성들은 저항의 최전선에서 몸을 던졌고, 지금도 역사의 현장에 당당히 한 주체로 서 있다.
하지만 같은 시각 광장 곳곳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공포의 현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수 많은 남성군중들에 둘러싸여 고립된 몇몇 여성들은 흉기로 옷이 찢긴 채 이리 떠밀리고 저리 던져지며 유린 당했다. 일부가 휴대용 가스통에 불을 붙여 휘두르며 군중들을 흩어보려 했지만 끔찍한 성폭력에 정신을 잃고 실려간 여성들이 속출했다. 이 날 하루 광장에서 벌어진 성폭력은 파악된 것만 무려 30여건에 달한다.
이집트 여성계에선 시민혁명 이후 외신 여기자들에 대한 무차별 성폭력이 이젠 반정부 시위 현장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은 권력을 장악한 무슬림 형제단 등 이슬람 세력이 시위참가 여성들에게 조직적으로 집단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반면 최근 여러 차례 벌어진 이슬람세력의 친정부 시위 현장에선 이런 성폭력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여성의 사회활동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일부 이슬람 세력이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들 사이에 공포를 조장하고 나아가 비이슬람세력이 중심이 된 반정부운동 자체를 차단하겠다는 목적이 분명해 보인다.
이처럼 여성들을 상대로 한 것뿐 아니라 이집트의 집권 이슬람 세력은 통치수단으로써의 ‘공포’와 ‘국가폭력’을 이용하는 데에 점점 더 익숙해져 가고 있다. 지난 주엔 모든 집회를 신고제로 전환하고 반정부세력을 무더기로 체포하기 시작했고, 어떤 반정부 활동가는 집권세력에 의해 납치돼 사막 한 복판에 벌거벗겨진 채로 나무에 묶여 발견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과연 이슬람 세력이 시민혁명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인권 개선과 민주적 권리의 확산을 제대로 실현한 의지와 역량이 있느냐는 이슬람권 내부의 근본적 회의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근본적 회의는 9·11 테러 이후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부시 독트린과 이에 따른 미국의 일방적 외교정책으로 빚어진 21세기의 문명충돌 과정에서 이슬람의 눈으로 이슬람을 이해하자는 내재적 접근을 주장했던 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내재적 접근은 서구에 의해 왜곡된 이슬람의 이미지와 문화적 특수성을 이해하는 데는 적잖은 역할을 했지만 시민혁명은 단지 압재와 철권통치로 그들을 짓눌러온 독재자들만 겨눈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으로 지속되고 있다. 첨단 통신과 SNS로 국경과 언어를 초월해 거미줄처럼 연결된 사회에서 세계 시민들이 지향하는 인간적 삶의 조건은 종교와 인종 등을 초월해 점점 더 보편적 성격을 지향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재자가 물러난 이슬람 국가에서 가장 핵심적인 저항의 대상은 점점 이슬람 그 자체로 변화해 가는 양상이 뚜렷하다. 이슬람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시민혁명의 확산에 긴장해 연일 엄청난 오일달러를 풀어대며 서민들의 불만을 무마하는 것을 보라.
이슬람에 대한 내재적 접근은 지난 2000년 동안 꾸준히 세를 확장하며 독특한 종교적, 문화적 독창성을 확립해 온 과거를 이해하는 데는 탁월한 관점이지만, 적어도 시민혁명 이후의 사회변화를 예측하는 데는 명확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실제로 2년 전 시민혁명이 시작됐을 때도 대다수의 이슬람 학자들은 결국 시민들이 독재권력과 타협하거나 굴복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었다.
아마도 시민혁명 이후 혼란이 지속되고 있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을 바라보는 불안한 시선은 당분간 거두기 어려울 것 같다. 독재자를 몰아낸 혁명의 1단계가 성공했다면, 그보다 더 지난한 혁명의 2단계는 이슬람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항이 성공할 지, 아니면 기독교가 유럽을 암흑기로 몰고 갔던 중세의 역사가 21세기에 이슬람세력에 의해 재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