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신문보다 품격있는 한국 신문?
[글로벌 리포트│영국]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버밍엄대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 limpidkim@gmail.com | 입력
2013.02.27 15: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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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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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스럽다.
영국에 와서 신문을 보면서 받은 인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렇다. 황당할 정도로 선정적인 영국의 대중지들을 보다 보면 한국 언론이 훨씬 품격있게 느껴질 정도다. 영국 대중지들의 막가파식 행태는 지난 글에서 다뤘으니 이 글에서 더 이상 다루지는 않겠다.
영국의 혼탁한 언론시장에서도 물론 정론지의 자존심을 지키는 신문이 있기는 하다. ‘데일리 텔레그라프’와 ‘인디펜던트’, ‘가디언’ 정도가 예가 될 수 있겠다. 여기에서 ‘타임스’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신문은 그 악명 높은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의 손아귀에 들어간 뒤 상업주의의 때에 심하게 얼룩져 버렸다. 때로는 황색지인 ‘더선’에나 실릴 것 같은 어처구니없는 기사도 이 신문에 버젓이 실리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다. 이렇게 ‘2류 언론’으로 얼마쯤 추락한 ‘타임스’보다는 ‘데일리 텔레그라프’가 영국 보수주의의 대변인 노릇을 착실히 하는 듯하다. 여기에 ‘인디펜던트’가 자유주의적인 의견을 내고, ‘가디언’이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그나마 영국 고급지 시장을 ‘3정립’한다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3대 정론지’도 영국 신문 특유의 선정주의와 상업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 23일 주말을 맞아 정론지 3개를 훑어볼 기회가 있었다. 참고로 전날인 22일 무디스는 영국 국채의 신용등급을 한 등급 낮췄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 기록적인 긴축 재정 정책을 펴고 있는 보수당 정권은 영국의 높은 신용등급이 영국 경제의 경쟁력을 반영한다고 주장해왔다. 무디스가 그런 영국 정부에 한방 먹인 셈이었다. 말하자면 영국 국가의 이해가 걸린, 중요하고 큰 뉴스였다. 게다가 영국 보수당이 노동자 파업 조건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을 검토한다는 소식도 전날 흘러나온 차였다.
그런데 정작 신문의 1면을 보면 시선은 모두 의외의 곳에 가 있었다. 세 신문 모두 남아공 육상 선수인 피스토리우스가 보석으로 풀려난 소식을 1면 사진기사로 큼지막하게 썼다. ‘인디펜던트’는 아예 2, 3면을 털어 법정 안팎의 소식을 전했다. 남아공이 영연방 국가라서 피스토리우스의 소식이 뉴스 가치가 높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 뉴스는 공공에 관한 중요한 뉴스라기보다는 가십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가디언’도 피스토리우스의 법정 소식에 1면의 거의 절반을 썼다. 영국의 신용 강등과 파업 관련 뉴스는 1면에서 사라졌다. ‘데일리 텔레그라프’가 그나마 신용 강등 소식을 1면 하단 기사로 소개했을 뿐이었다.
영국 고급 언론에서조차 나타나는 이런 특징은 영국 신문업계의 상업주의와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22일 신문에서도 이는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데일리 텔레그라프’는 제호와 1면 사진 사이에 한 페리업체의 광고를 큼지막하게 실었다. 그 크기가 정작 1면 머리 사진보다 컸다. 같은날 ‘가디언’은 2, 3면을 통째로 자동차 광고에 내줬다. 그러니까 2, 3면에는 기사가 없었다는 얘기다. 사실 이 정도는 점잖은 수준이었다. 지난해 7월 ‘더선’은 한 방송채널로부터 60만 파운드(대략 10억원)를 받고 1, 2면 그리고 마지막 두 면을 통째로 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제호 빼고는 신문 앞뒤로 모조리 광고였다는 말이다. ‘더선’이야 어차피 황색언론이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다. 그로부터 3개월 뒤에는 정론지 삼총사 모두 한 통신사에 1면을 나란히 내줬다. 그날만큼은 광고가 영국 신문의 얼굴을 잡아먹어버린 셈이었다.
영국 신문의 행태를 보노라면 우리나라 신문들이 그나마 품위있어 보인다는 필자의 말이 공감이 갈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잠시나마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2월23일 오후 6시30분(영국 시간 기준), 네이버 초기창에 뜬 10대 일간지들의 톱기사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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