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신문의 여론면이 위대한 이유
[글로벌 리포트│영국]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버밍엄대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 limpidkim@gmail.com | 입력
2013.04.03 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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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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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는 영국 신문에 대한 험담만 늘어놓았다. 물론 영국 신문이라고 해서 버릴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 신문을 넘기다보면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나올 정도로 부러울 때도 가끔은 있다.
무엇보다 탐나는 것은 영국 신문의 여론면이다. 영국 국민들이 놀라울 정도로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독자면은 기자들이나 전문 칼럼니스트들이 만드는 다른 지면보다도 훨씬 재미있고 유익하다. 여론면의 성격상 많은 공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인지, 독자들의 말은 ‘프로’ 글꾼들보다도 간결하고 명쾌하다. 그래서 주요 신문의 여론면만 훑어도 영국 사회의 여론 ‘생태계’가 매일 어떻게 짜여지는 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다. 필자도 두툼한 영국 신문을 일일이 볼 시간이 없을 때가 많은데, 그럴 때는 신문의 1, 2, 3면과 독자면만 훑어본다. 그만큼 영국 신문의 독자면은 알토란같은 내용이 많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3월29일에 나온 ‘데일리 텔레그래프’를 예로 들어 보자. 이날 여론면은 18명의 독자들이 보내온 글로 가득 찼다. 주제도 다양했다. 영국 정부의 외벌이가구에 대한 세제 정책(3명), 키프러스 사태(3명), 부활절 휴일의 날짜를 고정하는 문제(3명)에서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학교 급식용 플랩케이크(팬케이크의 일종)를 원형으로 만들어야 하는지의 문제(3명), 결혼반지를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사연(2명)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상당수는 이틀이나 사흘 전 이 신문에 뜬 기사에 대한 답글이었다. 예를 들면, 이틀 전인 27일 이 신문은 1면 머릿기사로 ‘영국의 외벌이가구의 세금부담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이 기사를 보고 분노한 주부 독자들이 보내온 글이 적지 않게 있었던 셈이다.
조금은 생뚱맞아 보이는 급식용 팬케이크 문제는 이틀 전 한 독자가 보내온 독자 투고가 발단이 됐다. 각진 팬케이크를 아이들이 서로 던지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다치는 경우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찌보면 사소해 보이는 이런 기고에 대해서도 독자 가운데 세명이 반응했다. 그 가운데 한명은 팬케이크 생산업자였는데 조금은 억울했나 보다. 불과 네줄짜리 짧은 투고에서 그는 “그럼 팬케이크를 부메랑 모양으로 만들어야 할까요?”라고 답했다.
어처구니 없는 내용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국 신문의 여론면은 이런 식으로 사소한 문제에까지도 신문과 독자 사이를, 그리고 독자와 독자를 잇는 구실을 하고 있다. 다른 신문도 비슷하다. 같은날 ‘가디언’(18편)이나 ‘인디펜던트’(12편)의 여론면도 독자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로 와글거렸다.
‘난장’에 참여하는 독자들도 다양하다. 앞서 가정주부들이나 팬케이크 회사 사장뿐 아니라, 정치인과 학자들도 일반 독자들과 함께 섞여서 목소리를 냈다. 이날 ‘가디언’의 여론면에는 노동당의 현직 국회의원이 보수당 연립정부의 재정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한국이라면 흔히 그럴싸할 얼굴 사진과 함께 글이 실렸겠지만 그의 글은 다른 일반 독자들의 기고에 묻혀서 1단 처리됐을 뿐이었다. 영국의 여론면을 넘기다보면 국회의원이나 대학교수 등 저명인사들이 이런 식으로 소박하게 목소리를 보태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물론 여기에 다시 투고가 이어지면 토론이 되고, 논쟁이 만들어지는 스토리는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론면은 이렇게 지식과 의견을 매개하는 시끌벅적한 ‘장터’ 구실을 하는 것이다.
한국 신문에서 독자를 향한 일방향적인 메시지만 보아온 독자로서는 그저 부러운 풍경일 뿐이다. 그렇다고 한국에서는 독자들이 유독 침묵을 지키는 마당에, 마냥 한국 신문만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과거 한국에서 기자로 일할 때 한 공공기관에서는 직원이 중앙일간지에 독자 투고를 하면 인사 고과에 반영해준다는 얘기까지 듣기도 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우리나라의 독자들이 얼마나 ‘과묵한지’ 알려주는 일화인 듯도 하다.
영국과 한국 사이의 문화적인 차이 탓만 하기에는 영국 여론면의 장점은 너무 커보인다. 무척이나 탐스러워 보이는 ‘남의 떡’을 우리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곰곰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독자들이 그렇게 과묵한지부터 의문이다. 페이스북만 봐도 그렇다. 하루가 멀다하고 부지런히 글을 올리는, 한국의 수많은 누리꾼들이 왜 신문 지면 위에 올라서서는 입을 다무는 걸까. 이들이 영국 독자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어쩌면, 독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 우리 신문들이 너무 오래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