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이 언론 자유를 위축시킬 소지가 커 법 조항에 ‘위법성 조각 사유’를 포함시키는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3일 송호창 의원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전국언론노조 주최로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린 ‘통신비밀보호법의 문제점과 언론의 자유’ 토론회에 참석한 한겨레 최성진 기자는 “국가기관에 의해 취재자유가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 기자는 지난해 ‘MBC-정수장학회 비밀회동’ 보도로 검찰에 기소돼 현재 공판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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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 송호창 의원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전국언론노조 주최로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린 ‘통신비밀보호법의 문제점과 언론의 자유’ 토론회에서 이상호 전 MBC 기자가 발언하고 있다. | ||
한겨레 최성진 기자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을 비롯한 많은 정부 부처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나 칼럼이 나오면 이른바 ‘전략적 봉쇄 소송’을 남발했다”며 “특히 국정원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허물이 드러나면 일단 소송으로 맞불을 놨다”고 밝혔다.
현장에서의 취재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점도 지적했다. 정수장학회 보도에 대한 검찰 기소뿐만 아니라 국정원 직원의 정치개입 사건을 보도한 한겨레 기자 고소,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동행 취재 언론인에 대한 집시법 위반 기소 등을 사례로 제시했다. 최 기자는 “이러한 기소는 또 다른 차원의 위협이자 폭력”이라며 “취재 결과물인 보도의 명예훼손 여부를 가리는 수준이 아닌 언론의 취재 과정 자체를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 기자는 “국가 기관이 언론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법적, 제도적 권한을 남용한다면 취재ㆍ보도 자유에 대한 위축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최 기자에 대한 검찰 기소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강혁 변호사는 “최 기자의 보도 행위는 통비법 위반죄를 인정할 여지가 없다”며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어야 했다. 무리한 기소는 명백한 공소권 남용”이라고 밝혔다.
공익을 위한 정당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됨은 물론 범죄의 ‘구성요건’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이 변호사는 “최 기자가 녹음하게 된 것은 새삼 작위적인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최 이사장과의 인터뷰 통화 및 녹음에 대한 휴대폰의 기능 작동을 멈추는 행위를 하지 않아서였을 뿐”이라며 “당시 최 기자는 최 이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끊자는 의사를 명확히 전달받지 못해 먼저 전화를 끊기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통화를 재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 “통비법위반죄의 보호 대상이 ‘공개되지 아니한’대화일 뿐 대화자들이 ‘공개할 의사가 없는’ 대화까지 확대할 수는 없다”며 “공개할 의사가 없었으나 (실수 등으로)본의 아니게 공개한 대화까지 보호대상이 된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현행 통비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됐다. 최진봉 성공회대 교수는 “현행 통비법은 지나치게 개인의 사생활 보호에만 치우쳐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위험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며 “언론이 권력기관에 대한 감시와 견제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위법성 조각사유를 넣은 법령 제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통비법에 범죄수사와 국가안보를 위한 통신 제한조치가 허용되는 예외조항에는 비판을 가했다. 최 교수는 “공권력에 의한 감청은 허용하고 권력의 비리와 부패를 감시하고 밝히기 위한 언론의 감청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며 “국민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공권력의 감청은 최소화하고 통비법이 더 이상 언론의 족쇄가 되지 않도록 공익적 목적을 위한 언론 활동에는 너그러워야 한다”고 말했다.
박태원 변호사도 ‘안기부X파일’사건 판례를 중심으로 통비법에 위법성 조각이 필요함을 피력했다. 박 변호사는 “판례에서 밝히고 있는 통신비밀 공개행위의 정당행위 성립요건이 협소해 실제 통비법에 위반될 경우 정당행위로 인정받을 여지가 없다”며 “소극적인 행위만을 요구해 언론기관의 취재 자체를 봉쇄하며 사실상 보도가 전면적으로 금지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MBC 이상호 기자가 보도한 안기부 X파일 사건은 2006년 1심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지난 2011년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했다. 대법원은 공개보도가 정당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불법 감청, 녹음 등의 범죄 사실 자체를 고발할 경우 △통신비밀 내용이 비상한 공적 관심의 대상일 경우 등의 요건을 충족해야한다고 밝혔다.
박 변호사는 “대법원은 명예훼손죄에 있어 미국 판례법의 ‘공인 이론’을 수용하고 있는데 ‘공인’에 대한 도청 문제도 언론의 자유를 적극 인정하는 취지가 바람직하다”며 “언론중재법도 개정을 거쳐 위법성 조각사유를 명시적으로 규정한 만큼 통비법도 이를 고려할 만하다”고 제안했다.
토론자로 나선 이상호 기자는 “언론은 법 준수가 1차적 목적이라기보다 국민의 알 권리와 사회적 소통, 합의를 위한 곳”이라며 “이 점에서 언론 자유에 너그러워져야 한다는 최 교수의 말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류신환 변호사는 “독수과실(독나무에서 자라난 과일은 사용할 수 없다)의 원칙에 따라 위법성 조각 사유를 일반화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면서 “통비법은 폭력과 강제력을 보유한 국가 및 수사기관이 불법적으로 증거를 수집하는 행위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경호 제주대 교수도 “중요 보도에 대한 기소로 언론을 위축시키는 사안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며 “통비법을 규제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나 언론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위법성 조각 사유를 공인과 진실보도에 맞춰 충분히 담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는 안철수 의원이 참석해 언론 자유를 지지했다. 안 의원은 “X파일 사건은 기득권과 권력의 유착관계를 보여주며, 진실을 기록하고자 했던 분들의 희생으로 이어졌다”며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는 기득권이 아닌 국민을 지켜주는 울타리인 만큼 그 울타리가 더 튼튼해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안 의원은 “잘못된 관행이 재발하지 않고 낡은 유산이 청산하는 길을 정치권에서 해야 한다”며 “앞으로 논의가 지속되기를 바라며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