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신문 전쟁'
[글로벌 리포트 | 영국]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버밍엄대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 limpidkim@gmail.com | 입력
2013.05.15 15: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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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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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규제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 문제를 놓고 영국 전체가 수년째 들썩거리고 있다. 영국 황색언론의 도를 넘은 취재 관행 때문에 불붙은 논쟁은 이제 정계와 언론계를 양분하면서 가히 점입가경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야기는 재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2011년 영국 ‘뉴스 오브 더 월드’의 폐간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168년의 역사를 지닌 이 신문은 영국 최대 일간지 ‘더 선’의 일요일판 신문으로 2010년에도 200만부를 넘는 판매부수를 자랑했다. 잘 나가던 신문이 하루 아침에 문을 닫게 된 이유는 패륜적인 취재 관행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사생활을 쥐 잡듯 캐던 신문으로 악명 높던 이 신문의 고약한 버릇이 조금씩 들통나기 시작한 것은 2006년부터였다. 이곳의 기자들이 특종을 좇는 과정에서 유명인의 전화를 도청하거나 경찰에게 뇌물을 건네준 사실이 드러났다. 가장 극악스러운 경우는 살인 피해자의 휴대전화에 남은 음성메일을 도청해서 지워버린 일이었다.
당장 여론이 들끓었다. 영국 여론을 주무르는 ‘밤의 황제’ 루퍼트 머독이 거느린 회사였지만 그도 시민들의 공분을 누를 힘까지는 없었다. 언론 개혁을 요구하는 캠페인도 시민사회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황색지의 사생활 침해에 쌓인 게 많았던 휴 그랜트 같은 유명인들도 동참했다. 비등한 여론에 밀린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수상은 지난 2011년 언론 취재 관행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를 지시했다. 그리고 2년 동안의 긴 조사 시간 동안 영국 황색 언론의 추악한 민낯도 백일하에 드러났다. 런던시의 경찰청장이 옷을 벗었고, ‘뉴스 오브 더 월드’의 역대 편집장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역겨운 취재 관행은 사실은 한 매체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 조사단은 지난해 11월 최종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몇가지 정책 대안을 내놓았다. 핵심은 독립적인, 강력한 규제 권한을 가진 언론감독기관의 설립이었다. 언론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캐머런 수상도 사실상 위원단의 제안을 거절했다.
조사위원단의 제안이 물론 그렇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를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가 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제1야당인 노동당과 제3당인 자유민주당이 조사단의 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대부분의 황색 언론이 이미 보수당을 지지하는 마당에 이들 정당으로서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2015년 총선이 다가오고 있는 참이었다.
참고로 1990년대 토니 블레어는 ‘언론 황제’ 루퍼트 머독의 노동당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수상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뒤 루퍼트 머독은 현재 집권당인 보수당 지지로 다시 돌아섰다. 노동당과 자유민주당으로서는 머독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지 못하는 바에야, 차라리 그의 입에 재갈이라도 물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셈이었다. 정치적인 공세에 밀려 우왕좌왕하던 캐머런 수상도 노동당의 요구에 일단 손을 든 모양새다. 캐머런 수상 스스로가 머독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실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그가 과거에 했던 거짓말이 줄줄이 드러나는 망신을 당한 탓도 컸다.
언론사들도 입장이 미묘하게 갈리기 시작했다. 일단 머독이 소유한 뉴스 인터내셔널을 중심으로 한 보수지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뉴스 인터내셔널은 구독 부수 1위인 황색지 ‘더선’과 8위인 정론지 ‘더 타임스’를 소유한 영국 최고의 언론재벌이다. 여기에 보수적인 황색지인 ‘데일리 메일’(5위)과 보수적인 정론지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합세했다. 말하자면 ‘보수지+황색지’ 연합인 이들은 문제의 법안에 대한 대체 법안을 지난달에 내놓기도 했다. 언론감독기관의 설립안을 사실상 무산시키겠다는 의도였다. 한편에서는 ‘언론 자유’라는 주요한 명분도 쥐고 있었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파이낸셜 타임스’(9위), ‘가디언’(10위), ‘인디펜던트’(11위)가 또 하나의 연합을 형성했다. 말하자면 ‘진보지+정론지’ 연합인 셈이다. 이들은 정부의 안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동시에 황색지들에 대한 규제도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인디펜던트’의 크리스 블랙허스트 편집장의 말이 이들의 복잡한 심경을 간단히 대변한다. “국가가 언론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나는 결코 바라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게 과연 누구 탓일까?”
영국의 언론 규제를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여기에 영국의 언론계와 정치계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얹고 보이지 않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동시에 그 배경에는 ‘언론의 자유’라는 난제가 도사리고 있다. 영국의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