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기자와 취재원의 위험한 거래
[스페셜리스트 | 법조]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사회부 법조팀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3.05.22 15: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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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하 경향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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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로부터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이 맡은 사건의 변호사가 찾아와 “요즘 당신이 내 의뢰인에 대해 사실과 다른 말을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다”며 해명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맡은 재판의 피고인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없던 부장판사는 순간 “어디서 그런 말을 듣고 오셨냐. 그런 말을 한 적도 없고, 해명도 들을 이유가 없다”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고 했다. 그만큼 변호인들은 그 부장판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갖가지 소문을 듣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법원 안에서 변호인단이나 홍보직원들이 특정 사건을 맡은 담당 재판부의 성향과 동향파악을 하는 사례는 흔하게 볼 수 있다.
가깝게는 펀드자금 마련 명목으로 계열사로부터 받은 출자금을 빼돌려 수백억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SK 최태원 회장 형제의 항소심 재판을 맡고 있는 재판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SK측 직원들은 이미 해당 재판부의 부장판사와 배석판사의 고향과 출신학교, 기존 판결분석 정보들을 모두 수집한 상태다. 수년 전 내린 판결문까지도 모두 분석해 재판부의 성향을 파악한다.
이 과정에는 법원을 출입하는 기자들의 정보력도 한몫 작용한다. 홍보직원들이 대거 출동해 법조를 출입하는 말단기자부터 팀장까지 끊임없이 밥과 술을 제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과정에서 기자들로부터 잘못된 정보가 수집되는 경우도 있다. 실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항소심 선고 당일 오전 한 홍보직원이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필자가 선고 전 주 금요일에 A언론사와 B언론사 팀장들과 함께 한화그룹 사건을 맡은 재판부 부장을 찾았는데 김 회장에게 집행유예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는 것이었다.
완전한 오보였다. 일단 그 자리에 간 적 조차 없었다. 만약 한화그룹 내 홍보직원이 법조출입 기자로부터 그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면 완벽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한화는 그 거짓말에 실낱같은 희망까지 걸고 있었다. 김 회장은 1년이 감형된 징역 3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또 다른 홍보직원은 한화사건의 주심판사가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엉뚱한 판사의 정보를 수집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그 직원으로부터 술접대를 받은 기자는 주심판사가 아닌 다른 판사의 프로필을 대며 “그 판사와 친하니 재판과 관련된 정보를 종종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정작 주심판사는 따로 있는데 말이다.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 자와 정보를 원하는 자 사이의 갑을 관계를 기자가 악용한 셈이다.
모든 출입처가 그렇겠지만 특히 법조기자의 생명은 인맥과 정보력이다.
문제는 이 인맥과 정보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기자들이 가끔 눈에 띈다는 점이다.
사소한 소문만으로도 재판의 공정성이 흐트러질 수 있는 법원 내에서 재판부와 관련된 억측을 사실인냥 꾸며내고, 해당 정보가 절실한 취재원에게 곶감 빼주듯 정보(그나마도 정확한 정보도 아니다)를 흘리고, 이를 이용해 또 다른 인맥을 쌓는 사례를 접할 때마다 법조출입기자라는 ‘specialty’가 자칫 악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최근 한 기업 취재원과의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법조 출입기자들에게 판사의 정보를 빼내려 해봤자 재판결과가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차라리 방금 퇴직한 전관변호사를 사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