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터넷 언론'이 던져준 교훈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편집위원회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3.05.29 15:45:17
해직 언론인이 중심이 돼 만든 인터넷 언론 ‘뉴스타파’가 언론계를 뒤흔들고 있다. 지난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공동으로 해외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이수영 전 경총회장 등 재계 총수 일가 명단을 공개한 데 이어 지난 27일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 등 재벌 총수와 대기업 전직 임원 명단을 추가로 공개했다. 이들은 모두 세금 회피 목적으로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는 “2000달러가 넘는 등록비와 매년 500~600달러의 갱신비를 부담하며 굳이 유령회사를 설립하는 이유는 결국 해외은행에 계좌를 만들어 사용하려는 떳떳하지 못한 목적 때문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번에 공개된 명단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뉴스타파 보도를 보면 1970년부터 조세피난처로 흘러들어간 대한민국의 자금 규모가 무려 870조원으로 중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다. 경기 침체로 세수 확보가 어려워지고 중산층, 서민들의 시름은 날로 깊어가는데 사회 지도층들의 재산은 해외은행 계좌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전방위 추적으로 외화 밀반출이나 탈세 등 불법행위 여부를 가려내야 할 국세청 등 정부기관이 이제껏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언론이 한 목소리로 사회 지도층들의 부도덕 실태를 경쟁적으로 고발하고 정부당국의 실체 규명을 지속적으로 촉구해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뉴스타파의 명단 공개를 놓고 벌어지는 언론의 보도행태를 보면 암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 신문은 뉴스타파를 소개하면서 ‘좌파성향의 독립 인터넷 언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특정 이념을 대변하거나 선동하는 매체라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심어주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적극적인 후속보도를 찾기도 어렵다. 뉴스타파가 보도하면 요약 정리하는 수준이다. 신문, 방송, 인터넷언론 가릴 것 없이 거의 대부분 매체들이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 명단을 확보하기 위해 워싱턴에 있는 ICIJ를 직접 찾는 등 심혈을 기울였지만 결과적으로 신생 인터넷매체인 뉴스타파에 대형 뉴스거리를 뺏긴 데 따른 불편한 심기가 소극적, 일회성 보도의 원인으로 꼽힌다.
대한민국 언론과 기자들이 특종거리를 뺏긴 것보다 더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은 수많은 대형 언론을 제치고 ICIJ가 왜 기자 수 20명에 불과한 뉴스타파에 조세피난처 한국인 명단과 관련한 데이터를 독점 공급했는가라는 점이다. 이는 생존경쟁에 급급한 나머지 비판정신과 야성을 잃어가는 대한민국 언론, 언론인의 공적 사명보다 소속 매체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회사원 기자들’에 대한 경고다.
근무여건이 열악해질수록 기자들은 더 소속 매체에 의지한다. 자신이 일하는 매체만 커지면 세상을 바꾸고 권력을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모든 매체들이 이런 착각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의 비판대상인 정치, 자본권력은 점점 더 커지고 교묘해지는데 언론은 갈수록 분절화되고 파편화된다.
전 세계 40여개국 80여명의 기자들이 조세피난처 관련 인사들의 명단을 밝혀내기 위해 공동작업을 벌여온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건 무엇인가. 기자들이 소속 매체의 이해를 떠나 거악과 맞서 싸우기 위해 힘을 모을 수 있을 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의 실현을 앞당길 수 있다는 점이다. 깨어있는 언론인의 조직된 힘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