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들에게 펜을 허하라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대한민국 언론 사상 초유로 벌어진 한국일보 편집국 폐쇄 조치는 사측과 일부 언론에 의해 ‘노사갈등’으로 비춰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본질을 왜곡할 수 있는 프레임이다. 한국일보 사태는 경영진의 뿌리깊은 무능과 범죄 혐의에 대한 절대다수 기자들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수년째 계속된 적자 행진에 상습적 임금 체불로 한국일보의 위상은 나날이 추락했다. 장 회장은 회사 회생을 위한 약속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다. 독자들에게 지면을 통해 공언한 중학동 사옥 이전도 사주의 과오로 거짓말이 돼버렸다. 200억원 배임 혐의는 추가 고발될 내용에 비하면 별 게 아니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오히려 한국일보 기자들이 여태까지 발휘해온 인내심이 대단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측이 이번 폐쇄 조치의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는 편집국 인사 논란도 결국 검찰 수사를 앞두고 있는 장 회장이 자기 사람을 배치해 조직적 보위를 받으려 한 데서 비롯됐다는 인상이 짙다. 언론사의 조직이 사주의 이해를 위해 악용되는 사례는 드물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하지만 한국일보에서만큼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는 한국일보의 창업주 고 장기영 회장의 말을 기억하기 바란다.

한국일보 현 경영진은 더 이상 한국일보를 살릴 자질이 없다는 사실은 한층 명백해지고 있다. 이번 사태를 맞아 사측이 내놓는 주장의 수준만 봐도 그렇다. 아무리 균형잡힌 시각으로 보려 해도 언론사 최상층부가 내놓은 것이라고 보기에는 ‘팩트’가 부실하고 설득력도 떨어진다.

한국일보는 사장 명의의 보도자료에서 “노조의 투쟁 목적이 ‘편집권의 독립’ 같은 기자 고유의 권한을 위한 것이라면 경영진도 양보할 용의가 있다”면서 “하지만 한국일보 노조의 유일한 목적은 ‘회장은 물러나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노사 합의의 편집강령을 위반해 편집권 독립을 침해한 것은 바로 장 회장이다. 강령에 따라 실시된 투표에서 부결이 됐는데도 이영성 국장 해임을 강행하고 과반의 반대로 임명동의에서 탈락한 인물을 편집국장으로 밀어넣는 것도 바로 장 회장이다. 지난달 15일 정부를 비판하는 1면 기사를 바꿔치기한 것은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한국일보 기자들이 싸우는 목적은 회장 퇴진이 아니라 한국일보의 정상화다. 경영파탄에서 회사를 구해내고 신문다운 신문을 만드는데 걸림돌이 된 최고 경영자에게 이제 그만 떠나달라고 하는 것 뿐이다. 참다못한 기자들이 퇴진 요구를 한다고 시비를 걸기 전에 장 회장은 지난 10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냉정히 돌아보기 바란다. 일반적인 주식회사라면 이미 해임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일보 사측은 기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폭력행위로 모함하려는 시도까지 벌이고 있다. 출처도 불분명한 요청에 출동한 경찰과 구급대마저 빈손으로 허탕치고 돌아갔는데 부상자는 어디로 증발했단 말인가. 이는 다급한 나머지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려는 뻔한 궁여지책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장 회장에 대한 마지막 연민마저 사라지게 될 지경이다. 진정으로 한국일보를 사랑한다면 형제처럼 지내왔던 기자 선후배들을 원수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이제라도 역사에 남을 과오인 편집국 폐쇄조치를 해제하고 기자들에게 펜을 돌려줘야 한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