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를 만드는 자'들에 대한 거대한 저항

[글로벌 리포트 | 남미]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2013년 6월의 브라질은 뜨거웠다. 21년 만에 최대 규모로 벌어진 시위가 전국을 들끓게 했다. 상파울루를 비롯한 주요 도시의 거리는 변화와 개혁을 외치는 함성으로 메워졌다. 누군가는 잠자던 브라질 국민이 깨어난 것이라고 했다.

시위는 시내버스와 지하철, 기차 등 대중교통 요금이 인상되고 나서 6월 6일부터 시작됐다. 오래지 않아 시위의 초점은 정치권의 부패·비리를 비난하고 보건·교육·치안 등 공공서비스 개선을 요구하는 주장으로 옮겨졌다. 시위대는 치솟는 물가에 항의했다. 2014년 월드컵 축구대회 개최에는 막대한 돈을 쓰면서 국민생활을 위한 투자를 외면하는 정부를 질타했다.

처음 상파울루 시에서 2000여명으로 시작한 시위는 규모를 빠르게 늘리면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6월 20일 전국 100여개 도시에서 벌어진 시위에는 100만명이 참가해 절정을 이뤘다.

시위는 국제적으로도 관심을 끌었다. 북미와 남미, 유럽 각국에 사는 브라질인들이 시위를 지지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세계적인 톱모델 지젤 번천과 페이스북 공동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마크 저커버그 등 유명 인사들이 응원 메시지를 올렸다. 브라질 축구 대표팀 선수들도 시위를 지지하고 나섰다.

브라질 제1·제2 도시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를 비롯한 각 시 정부는 결국 시위 발생 2주 만에 대중교통요금 인상 방침을 철회했다.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은 정치개혁을 위한 국민투표 시행과 반부패법 제정 등을 약속했다. 당장 내년 10월 대선을 앞둔 호세프 대통령으로서는 민심 수습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시위 사태가 다소 진정되면서 다양한 진단이 쏟아져 나왔다. 재무장관 시절 하이퍼 인플레를 잡은 정책으로 국정 최고책임자의 자리에까지 오른 페르난도 엔히케 카르도조 전 대통령은 “치솟는 물가가 서민들을 거리로 끌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현직 연방검찰총장은 “‘처벌받지 않는 권력층(기득권층)’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라고 해석했다.

‘역사의 종언’으로 널리 알려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글로벌 중산층’(global middle class)의 성장에서 시위의 동력을 찾았다. 후쿠야마는 새롭게 부를 쌓고 교육받은 중산층의 높아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정부의 실패가 시위의 주제라고 설명했다. 중산층이 정치엘리트들의 부패 문제와 더불어 보건·교육 등 공공서비스에는 소홀하면서 월드컵과 같은 ‘보여주기 프로젝트’에만 치중하는 정부 행태를 집단적으로 비판한 것이 이번 시위라는 것이다.

시위 원인을 브라질 사회 저변의 상황에서 찾는 시각은 ‘질서를 만드는 자’와 ‘질서를 지키도록 강요당하는 자’ 간의 갈등이 표출된 것으로 본다. 기득권층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질서에 대해 국민의 항변이 대규모로 나타난 것이 이번 시위를 가장 현실적으로 해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브라질은 ‘질서를 지키도록 강요당하는 자’들이 여러 차례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가져온 경험을 갖고 있다.
1984년 4월 16일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 시위에 40만명이 참가했다. 이 시위는 정치 민주화를 가져왔고, 훗날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전 대통령이 이끄는 노동자당(PT) 정권 출범의 발판이 됐다.

1992년 8월 25일 20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상파울루 시에서 벌어진 시위는 측근 비리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던 페르난도 콜로르 데 멜로 당시 대통령의 탄핵을 끌어내는 요인이 됐다.

1992년 이후 21년 만에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이번 시위의 핵심 메시지는 ‘변화와 개혁’으로 요약된다.

호세프 대통령이 정치개혁 국민투표를 제의한 것과 맞물려 70여 개 시민·사회단체는 정치개혁 캠페인을 시작했다. 캠페인 명칭은 포르투갈어로 ‘지금 당장 정치개혁을’이라는 뜻의 ‘헤포르마 폴리티카 자’(Reforma Politica Ja)다. 1980년대 중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전개된 민주화 운동 ‘지레타스 자’(Diretas Ja, ‘지금 당장 직접선거를’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정치권이 시위에서 나타난 국민의 기대와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이 야기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여론조사에서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최근 10년 사이 최악의 수준으로 추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이 법과 제도의 정당성과 대표성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유력 여론조사업체인 다타폴랴(Datafolha)는 공공 권력이 국민의 참여를 확대하고 국민과 적절하게 소통할 수 있는 시스템을 시급히 구축하지 않으면 이번과 같은 시위가 언제든 재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번 시위 사태가 다소 혼란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체된 브라질 사회에 다이내믹한 자극제가 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거리의 목소리가 브라질 사회에 또 한번 거대한 변혁을 가져올지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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