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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태 전 한겨레 기자 | ||
또 한번 실망했다. 이번에는 영국 황색 언론의 도를 넘는 선정성이나 상업주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에는 영국 민주주의 근간이라고 인식되는 언론 자유가 억압받는 이야기다.
발단은 지난 5월 ‘가디언’지의 특종이었다. 보도의 내용은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졌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미국 국가안전국(NSA)은 지난 2007년 이래 자국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등 전세계에 걸쳐서 민간인의 이메일과 페이스북, 통화 내역 등을 무차별적으로 감청 및 해킹했다. 이 과정에서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페이스북 등 주요 정보통신 관련 업체들이 미국 정부로부터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지원을 받고 협조를 한 정황도 드러났다. 영국의 정보기관인 정보통신본부(GCHQ) 역시 미국과 정보를 교환하는 공범 구실을 했다.
문제는 보도로 불법의 덜미가 잡힌 영국 정부의 행태였다. 보도가 나간 며칠 뒤, 정보기관 고위 관료 두 명이 ‘가디언’지 본사에 나타나 관련 자료를 모두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가디언’에서 이를 거부하자, 곧 법적인 절차를 밟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기밀 정보의 공개에 관한 법률 등을 근거로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가디언’지는 해당 정보가 담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정보통신본부 요원 두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파기했다. 자료를 제출하느니 차라리 없애버린 행위는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까웠지만, 언론사로서는 참기 힘든 굴욕인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가디언’지가 파기된 하드디스크의 사진과 함께 사건의 경위를 상세히 설명한 기사를 내보내자, 정보기관은 다시 요원들을 보내 앨런 러스브리저 편집국장을 비롯한 간부 3명을 추가 조사했다. 이쯤되면 탄압이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문제의 특종을 쓴 글린 그린월드 기자의 동성 파트너인 데이비드 미란다가 지난 8월 18일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9시간이나 경찰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구금의 근거는 테러리즘 방지를 위한 법이었다. 테러리스트 용의자에게나 적용될 법이 언론인의 주변인을 구금하고, 언로를 막는 구실로 사용된 셈이었다.
자유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영미권은 민주주의의 근간으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매우 강조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수정헌법 제1조에서 “연방의회는 언론, 출판의 자유나 국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언론 탄압은 매우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오죽하면 북유럽의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3개 신문사의 편집장들이 지난 8월 24일 공동명의로 영국 ‘옵저버’에 보낸 편지에서 “지난 한주 동안 영국에서 벌어진 일은 매우 걱정스럽다”며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에 대해 “언론 자유를 수호하는 주요 국가의 하나로 영국이 다시 자리매김하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정부조차도 이런 영국 정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지난 8월 20일 미국 백악관 대변인인 조쉬 어니스트는 공식 브리핑 자리에서 영국의 언론 탄압에 대해 “상상하기 매우 힘든 일”이라고 분명한 거리를 뒀다.
그렇다면, 사건의 진앙지이자 언론 자유의 ‘천국’인 미국은 어떨까. 영국과 달리 언론 자유가 잘 보장돼 있을까. 딱히 그래보이지도 않는다. 이 사건을 처음 접한 이들이 가졌을 궁금증 가운데 하나는 왜 하필 사건의 제보자인 미국인 에드워드 스노우든이 자국의 무수한 언론을 놔두고 대서양 건너 영국의 일간지 기자를 찾았느냐는 점이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지난 6월 ‘가디언’지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보도를 보면, 미국에서 ‘뉴스타임즈’ 등 미국 주류 언론의 보수적인 보도 행태에 환멸을 느낀 스노우든은 미국의 기성 언론을 제보 대상에서 제외시켜버렸다. 그러다 연결된 곳이 영국의 ‘가디언’이었다. 미국에서의 언론의 자유에 대한 그의 불신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오바마 정권 하에서도 큰 변화는 없었다. 스노우든은 지난 6월 ‘가디언’ 독자들과의 온라인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바마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많은 문제들은 바로잡을 것처럼 이야기하고 다녔죠. 불행하게도, 그는 당선이 된 다음에는 관타나모의 인권 침해 문제 등에 대해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불법적인 관행에 대해서 조사를 하려는 시도도 봉쇄해 버렸습니다.”
이제 갓 서른살의 청년은 미국 공권력을 피해 아직도 도주하고 있다. 대형 범죄를 저지르다 덜미가 잡힌 미국 정부는 적반하장 격으로 ‘정보 재산 절도’ 등의 혐의를 내걸고 그를 쫓고 있다. 영국 정부는 스노든의 제보를 보도한 ‘가디언’을 공개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됐다는 ‘선진국’ 미국과 영국에서 벌어지는 날 것 그대로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