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영원한 벗, 최인호 작가 잠들다
한국ㆍ조선 등 오래된 인연 눈길…"만들어진 작가 아닌 타고난 작가"
강진아 기자 saintsei@journalist.or.kr | 입력
2013.10.02 13:4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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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5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최인호 작가. 그는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벽구멍으로’ 가작 입선,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견습환자’가 당선됐다. ‘별들의 고향’, ‘상도’ 등 많은 소설을 신문에 연재했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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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작가’로 불리는 최인호 작가가 지난달 25일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2008년 침샘암으로 투병한 지 5년 만이다. 언론들은 그의 일생을 돌아보며 “깊고 푸른 밤, 별들의 고향으로 떠났다”며 애도했다. 투병 마지막 순간까지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으며 작가로 남길 원했던 최 작가. 끊임없이 작품을 남긴 그는 특히 신문사들과 남다른 인연을 자랑한다. 문단에 첫 발을 들인 한국일보와 폭발적인 인지도를 높인 조선일보 등 신문사들은 그의 오랜 ‘벗’이었다.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은 최인호 작가는 한국일보와 가장 오래된 인연을 갖고 있다. 그는 1963년 서울고 2학년 시절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으로’로 가작 입선했다. 당시 한국일보는 수상식장에 나타난 그를 보고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에 당선이 아닌 가작으로 처리했다. 고인은 생전 당시 “그때 심사위원인 황순원, 안수길 선생으로부터 ‘신선한 문장이 돋보인다’고 평가받았지만, 막상 시상식장에 고등학생이 나타나자 ‘속았구나’라는 표정이었다”고 회고했다. ‘벽구멍으로’ 원고는 1964년 한국일보 중학동 사옥 화재로 소실됐다.
이후 10년 만인 1973년 그는 당시 한국일보 자매지인 일간스포츠에 ‘바보들의 행진’을 연재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국일보에 연달아 작품을 게재했다. 1995년 ‘사랑의 기쁨’과 1997년 ‘상도’다. 상도는 당시 400만부 이상이 팔리며 독자들의 높은 반응을 얻었고, 나중에는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1995년 당시 문화부장이었던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은 ‘사랑의 기쁨’ 연재 소설로 최인호 작가와 인연을 맺었다고 회상했다. 임 고문은 블로그를 통해 “작품에 대한 열정과 애착이 대단했다”며 “키도 작은 사람이 시가를 피우며 밝게 웃는 모습이 귀여웠고, 언제나 유쾌한 개구쟁이 청년 같아서 만나는 게 즐거웠다”고 밝혔다. 최 작가는 한국일보에 애정을 보였다고 했다. 언론계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일보와 한국일보 기자들에게는 아직 예전의 낭만이 남아 있다. 낭만은 젊음이고, 젊음은 곧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고 말했다는 전언이다.
정치적인 문학 단체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엔 시론도 상당수 썼다. 1974년 한국일보에 ‘청년문화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유신독재를 비판하고 ‘청년들의 시대가 온다’는 시론을 실어 청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조선일보를 통해서는 대중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렸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별들의 고향’이다. 앞서 1967년 연세대 대학생 시절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견습환자’가 당선됐다. 당시 그는 여러 신문에 소설을 투고한 후 군대에 갔는데, 군대 복무 중 부대로 당선 소식이 전달됐다. 부대 중대장이 고시 합격인 줄 알고 전 부대원에게 외출을 허락됐다는 일화는 최 작가의 자랑거리였다. 어수웅 조선일보 문학담당 기자는 “당시 얼마나 자부심이 넘쳤는지 중대장에게 당선된 것이 한 곳뿐이었냐고 묻기도 했다”며 “투고했을 때 이미 그는 당선소감도 함께 보냈다”고 전했다.
1972년 신문에 처음 소설을 연재한 장편 ‘별들의 고향’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어 기자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였다”며 “한 종합병원에서는 간호사들이 조선일보에 연재된 별들의 고향을 읽기 위해 신문 페이지를 찢어가며 싸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본래 별들의 고향은 ‘별들의 무덤’이 제목이었으나 무덤이라는 말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조간신문에 어울리지 않는다 해서 고향으로 바뀌었다.
이후 조선일보에는 1985년 ‘잃어버린 왕국’을, 1991년 ‘왕도의 비밀’을 연재했다. 소설가 김연수씨는 “조선일보에 연재된 잃어버린 왕국을 통해 신문 연재 소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처음 알았다”고 밝힌 바 있다.
휘갈겨쓴 악필로 유명한 고인이었기에 문학 담당 기자들은 소설이 연재될 때마다 고생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늘 원고지와 만년필을 선호해 기자들은 날 것 그대로의 글씨를 활자에 옮겨야 했다. 임 고문은 “소설을 연재하면 그는 늘 교정(교열)부에 가장 먼저 찾아가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했다”며 “제게 선물로 보낸 소설 앞 장에는 임철순 ‘님’에게 인지, ‘놈’에게 인지 헷갈렸을 정도”라고 말했다.
1970~80년대 중흥기였던 신문 연재소설이었지만 90년대 이후 경제위기 등으로 점차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늘 신문과 함께였기에 신문사들은 서로 다투며 그와 연재하기를 손꼽았다. 그는 동아일보에 ‘겨울 나그네’, 중앙일보에 ‘길 없는 길’과 ‘해신’, 서울신문에 ‘유림’, 부산일보에 ‘제4의 왕국’, 샘터에 ‘가족’ 등 많은 작품을 선사했다. 임 고문은 “그가 말하길, 한참 전투를 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전우는 죽고 혼자 남았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를 아는 기자들은 한결같았던 최 작가의 인간적인 매력에 감탄했다. 고인을 자주 만나 취재했던 어 기자는 “장난기 있는 눈빛, 개구쟁이 느낌의 매력이 있었다”며 “어떤 작가보다도 사람과 빨리 친해지고 가깝게 빨아들이는 놀라운 인간적인 재능을 가진 분”이라고 회상했다. 임 고문도 “유쾌한 청년이자 탁월한 작가”라며 “그는 결코 만들어진 작가가 아닌 타고난 작가였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