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기자의 청해부대 고군분투기



   
 
   
 
아기를 출산한 지 6개월도 채 안된 내게 만약 누군가 “출산과 군대생활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힘들 것 같냐?”는 질문을 한다면 한참을 망설일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출산과 군대생활, 국방부 취재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고된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번엔 후자에 손을 들어 주고 싶다. 늘 바로 폭격탄을 맞아야 하는 총 없는 군인들이 내가 본 국방부 선후배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운 좋게도(?) MBN에 경력으로 입사해 첫 출입처로 국방부를 발령받았다. 군인들의 계급장도 제대로 모르는 내겐 국방부 기자실에 앉아 있는 선배들도 군인처럼 보일 정도로 이질감이 크게 들었다. 무기연감을 펴면 도무지 기억에 남지 않아 한 장을 못 넘기기 일쑤였다. 또 육해공군의 훈련은 왜 그리 많은 지 여기자로서 보기에는 여기서도 ‘펑!’ 저기 서도 ‘펑!’ 똑같은 폭발음이건만 표현은 달리해야 되니 기사를 쓰는 일이 훈련만큼이나 힘들었다. 그게 나는 내가 여기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방부에는 내가 출입할 당시 이미 세 명의 여기자가 출입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선배는 이미 다년간 군사 분야만 취재해 오신 군사전문기자이기에 여기자이기 때문에 기사 쓰는 게 어렵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위한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바뀐 출입처에 마음을 열지 않았을 뿐이었다.
생각을 달리하니 얼굴이 까만 소령도 덩치 큰 대위도 모두가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군사전문용어 혹은 훈련들을 일반인들이 쓰는 말보다 더 쉽게 설명해주는 최고의 백과사전이었다. 나는 어느새 어떻게 하면 나와 같은 여자들도 국방뉴스를 친근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해하기 쉽게 접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찾은 답은 현장멘트였다.



출장을 가면 부대에서 식사를 하고 군인들이 이용하는 숙소에서 잠자리를 해결하니 조금이라도 더 군인스러운 현장멘트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국방부를 출입하는 선배들과도 다른 출입처에서 가졌던 선후배간의 정이 유난히 남다른 것을 금새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내가 선배들보다 한참 연차가 어려서도 아니고 여기자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속성으로 무르익은 전우애같은 거였다.



오히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베테랑인 선배들과 훈련현장에서 느낀 것은 취재에 대한 노련함이 아니라 거친 훈련에도 부대끼는 속을 참아내는 의지였다. 기차의 역방향을 타지 못하는 선배는 기자들 모두가 역방향밖에 예매하지 못해 지방 훈련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추운 복도에서 떨어야 했다. 군대에 다녀온 지 20년이 훌쩍 넘은 선배도 연초만 되면 찾아오는 초계비행 취재 당시 서지도 내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간이침대에 누워 눈을 질끈 감고 다섯 시간 동안 비행을 참아야했다. 몸이 안 좋아 현역판정을 못 받은 선배도 커다란 이지스함을 타는 동안 바다를 향해 몇 번이나 속을 게워낼 정도로 하늘과 바다, 땅의 전방을 취재하는 선배들의 숨은 노력들은 계속됐다.



이런 선배들 옆에서 현장멘트를 할 때 나는 스스로가 군복만 걸쳤을 뿐 뭔가 속은 비어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노력은 했지만 혼이 부족하다는 판단이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졌다. 기사를 봐주는 팀장선배가 기사를 다시 쓰라고 하면 내 기사에 대한 조금의 해명이나 주장을 펼치기 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그런 내게도 충분한 고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역만리 해역에 있는 청해부대 취재이다.



회사는 보도채널에서 종합편성채널 출범을 앞두고 시청자들을 감동시킬만한 아이템을 찾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우리 부에서는 청해부대의 해적소탕작전이 거론됐다. 그리고 함께 취재 가기로 한 타사의 내부사정으로 MBN이 단독으로 청해부대 8진을 함께 하게 됐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종편출범을 기념할 만한 취재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밑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하지만 답은 엉성할 뿐이었다. 당시 청해부대 8진이었던 문무대왕함을 타보지 않고 어떻게 아덴만을 가르는 파도를 논할 수 있을까. 말이 해적소탕작전이지 해적이 나타나지 않으면 끝이었다. 하루, 이틀 청해부대 대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해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부대 곳곳을 취재했다. 훈련장에서 현장멘트를 할 때 아무리 고민을 해도 적절한 문장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부끄럽지만 ‘여기자 최초’라는 말을 썼다. 물론 군 관계자들의 확인작업을 거친 뒤에 여기자인 내가 최초로 훈련에 임할 경우에만 활용했지만 기회가 처음으로 주어졌을 뿐이지 내가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마련한 아이템이 아니기에 뉴스 모니터링을 할 때면 얼굴이 달아오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청해부대는 달랐다. 내가 여기자이기에 소개해야만 하는 여군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해부대에는 약 열 명의 여군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군인 수백명을 태운 함정이라지만 여군들이 배 생활을 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까닭에 여군들을 위한 시설도 이제 막 시작되는 단계였다. 나는 열 명의 여군들이 쓰는 삼층 침대의 한 쪽에서 일어날 때마다 쇳덩어리에 머리를 부딪히며 새벽기상을 했다.



여군이라고 특별히 배려 받는 건 없었다. 단지 맡은 임무가 여자들이 더 잘할 수 있는 탐지분야가 많을 뿐이었다. 한창 연애를 할 나이에 남자친구가 없는 여군이 남자친구가 있는 여군보다 곱절이나 많았고 그 흔한 화장이나 매니큐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 위에 있어 하루 네 끼를 먹어야 하는 식사량 때문에 또래들처럼 못 지킨 다이어트 계획에 한숨만 쉴 뿐이었다. 도대체 왜 여군을 똑같은 군인이라 부르지 군 앞에 ‘여’자를 넣는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청해부대 취재는 시간이 흐를수록 해적도 나타나지 않고 함정 안에서의 취재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여군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이내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눈 진지한 대화들이었다. 답은 수십번은 울고 웃으며 담금질했을 그들의 다짐 속에 있었다. 남자 군인들과 똑같이 군생활을 하기 위한 그녀들의 ‘고군분투 24시’가 바로 그것이다.



청해부대 8진에는 여자간부가 딱 한 명 있었다. 여러 방면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여 청해부대에 자원해 당당히 문무대왕함에 올랐다. 그리고 아직 여군은 한 번도 오른 적 없는 잠수함에 오르기 위해 남들과 똑같이 훈련에 임했다. 아덴만 한 가운데에서 말하는 잠수함의 꿈, 그 커다란 바다 위에서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 진실하다 못해 거룩해 보이는 꿈이었다. 매번 남자군인들의 커다란 훈련복을 고무줄로 조이고 당겨 입던 나는 처음으로 내 몸에 딱 맞는 군복을 입고 현장멘트를 했다. ‘지금까지 청해부대에 오른 여군들은 쉰 명 가까이 된다. 이들의 꿈이 오롯이 이뤄질 수 있도록 여군들의 숫자만 늘어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여군의 역할과 여군을 위한 시설도 점검돼야 할 것이다.’



이렇게 여군 24시를 취재하던 찰나에 드디어 기다리던 경고음이 울렸다. 해적으로 의심되는 선박이 나타났다는 사이렌이었다. 마침 촬영선배와 여군들의 생활을 취재하고 있었기에 경고음이 울리는 순간부터 모든 군인들이 전투배치에 임하는 전과정을 생생히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해적을 가까이 담을 수 있는지는 묵묵부답이었다. 온 세상이 까만 어둠에 뒤덮여 한 걸음 한 걸음이 천 근 만 근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준비된 멘트도 없이 생생한 현장을 담기 위해 당시 상황을 묘사하는 걸로 현장멘트를 마무리했다. 말을 조금은 더듬었지만 세상에 단 한 번뿐인 위급한 상황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현장멘트를 담기 위해 문장을 다듬고 발음도 명확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텐데 그런 고민들마저 여유로 다가왔다.



그 순간, 나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여군들은 배 구석구석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결국 레이더에 포착된 해적의심선박과의 대치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지만 여군들은 UDT 저격수의 매서운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로 치면 친동생보다 어린 20대 중반이 대부분이었다. 눈앞의 이들에게 나도 나의 가족도 나라를 맡겼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날 밤 이어진 취재에는 한정된 시간으로 방송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한 여군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가 읽어졌다. 애국이 따로 없었다. 부모 앞에서는 철부지 딸이지만 밥 한 공기를 먹고 훈련 하나를 하더라도 모든 것이 아덴만 해상의 자랑스런 대한민국, 청해부대의 역사였다. 그들의 가족에게는 여군이기 전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들이었다. 부모 입장에서는 나라가 있고 동료가 있지만 딸들이 전화 받을 틈도 자유롭지 못한 바다생활을 하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이들 중 다수가 또 청해부대를 자원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그들의 가족들에게 내가 이들의 군복을 입고 현장멘트를 하는 것만으로도 딸이 어떻게 지내는 지 알 수 있어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뉴스가 방송되고 한 계절이 지난 뒤 나는 결혼을 하게 됐다. 흑룡의 해인데다가 윤달까지 껴 식장 잡기가 수월하지 않아 임의로 잡은 날에 식을 올리게 됐는데 그게 하필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이었다. 북한은 태양절 전후로 광명성 3호 발사를 유력시 하고 있었다. 내 결혼식이 선배들과 군인들에게는 가장 바쁜 날이 된 셈이다. 결국 국방부 선배들은 내 결혼식장이 아닌 중계차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결혼 이틀 전까지 급박한 상황을 따라가느라 결혼준비가 여의치 않았던 터라 이역만리 해역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생사를 함께한 여군들도 초대하지 못했다.
그 뒤로 나는 임신과 더불어 국방부 훈련 취재에서 빠지게 됐고, 이후 국방부에서 통일부로 출입처가 바뀌었다. 국방부나 통일부나 ‘확인해 줄 수 없는 사안’이 많은 부처라 늘 전시태세에 대기 중이여야 하기에 청해부대에서의 생활이 실제 취재현장에서도 큰 힘이 됐음은 물론이다. 가끔 아침 일찍부터 처리해야 할 기사가 많을 때면 세수를 하다 말고 좁은 복도로 뛰쳐나간 여군들의 뒷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만약 누군가가 출산과 군생활, 국방부 취재 가운데 가장 힘들다고 생각되는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답을 하기 전에 출산과 군입대, 국방부 취재를 당하는 여군에게 여군이 되고 싶은 이유를 물으라고 권하고 싶다. 내겐 여군이 출산의 고통을 지나 육아로 인한 허리, 어깨 통증을 계속 짊고 살아가야 하는 여자의 일생에 남자들도 힘겨워하는 군생활까지 헤쳐나가는 슈퍼우먼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청해부대 8진의 유일한 여간부는 바다라는 드넓은 무대에서 활동하고 싶어 여군에 지원했다고 했다. 힘든 것보다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꿈을 실현하게 해 줄 바다가 있어 모든 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겐 고통을 묻는 질문이 누군가에겐 희망을 답하는 매개가 된다는 사실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아마도 국방부를 처음 맡았을 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여전히 국방부에는 일이 많다. 육아를 이유로 선후배들과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군 관계자들을 찾아뵙지 못한 지 1년이 다 돼 간다. 지금도 청해부대는 이역만리 해역을 항해하고 있고 국방부 부스에는 또 다시 말 못할 속사정을 가진 선후배들이 훈련 취재일정에 힘겨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방부를 처음 출입했을 당시로 돌아간다면 적어도 여기자라는 이유로 훈련을 멀리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몸에 맞는 훈련복 한 벌을 입을 기회가 조금 더 일찍 있었더라면 마음의 벽이 보다 일찍 허물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덴만 해상에서 내 몸에 꼭 맞는 훈련복을 입고 현장멘트를 했을 때 칠흑 같은 어둠도 신뢰로 만든 바다 위의 12초가 내게 보다 일찍 찾아왔을 수도 있을 거란 확신 때문이다.



이역만리 아덴만 해상에서 들었던 여자 간부의 꿈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전 세계 물동량의 12%, 원유의 3분의 1이 오가는 바다 위의 실크 로드를 수놓았던 여군들의 꿈이 꼭 이뤄질 수 있도록 여군들에 대한 관심이 계속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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